제주도

제주도 <4·3 다랑쉬굴>

아리1 2019. 11. 27. 09:01

2019. 5. 27/28. 월/화. 일어나 밖을 보니 어제 내리던 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니 큰비는 아니었으나 바람이 좀 세계 불어 우산을 쓸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습관이 된 것 같다. 바람 돌 여자. 하나 더 보태면 비. 제주도가 또한 이런 곳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를 보니 바로 그칠 기세가 아니었다. 내일도 이렇다면. 그래서 다른 일정 어쩌면 이번에 가장 중요하다 할 4·3 항쟁 잃어버린 다랑쉬마을과 다랑쉬굴을 찾아보는 일을 다음 기회로 미루고 완도로 돌아가기로 했다. 제주 여객항에 가니 모든 뱃길이 끊어졌다 했다. 13시 40분 시외버스 역으로 돌아와서 다랑쉬오름으로 감. 조금 늦긴 했지만. 가면서 보니 '대기고'란 고등학교 이름을 영어로 'daykey'라 했다.

 

 

 

13/15분. 여객항에서 돌아옴. 제주도는 비가 오지 않는 날은 보통 물이 이렇게 많이 차 있지 않으나 이런 모습을 보니 이번에 비가 많이 오기는 온 것 같다.

 

 

 

 

15/5분                                                                                                  다랑쉬오름

 

 

 

아끈다랑쉬오름

 

 

 

 

 

 

둘레길 알리미

 

둘레길이 3.4km

 

 

 

15/10분. 둘레길 첫머리. 지난번<2017>에는 이 오름에 올라갔으므로 이번에는 둘레길을. 혹시나 4·3 항쟁 당시 어떠한 흔적이라도 하는 뜻에서. 없었음. 오름 가운데 둘레길이 있는 오름은 이곳이 처음이다.

 

 

 

                   둘레길을 지나면서

가장 왼쪽 말 안장처럼 생긴 오름은 동검은이오름<거미오름>

 

 

 

위 오름은 손자봉 <또는 손지봉. 제주말로는 손자를 손지라 함>

 

 

 

이 오름은 '높은 오름'. 주변 오름보다 높다<405미터> 해서 붙여졌다 함. 이 다랑쉬오름은 382미터.

 

 

 

 

 

 

제주와 오름. '오름으로 나서 오름으로 웃고 오름으로 울다가 오름으로 간다.'

 

 

 

 

 

 

16시                                                                                         다랑쉬오름 <Darangshi - Oreum>

 

여기 심어진 삼나무 편백 등은 왜에서 들여와 심은 듯.

제주도 360여 개의 오름 가운데 오직 이곳만이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오름의 오름 거문오름에도 그러했으니.

거문 오름에 불이 나서 세계자연유산 지정에 지장이 생길 것을 염려해서.

그렇다면 지금은 이들 왜에서 온 나무들 캐내고 우리나라에서 난 나무 심어도 되지 않을까?  

 

 

 

 

 

 

제주 4·3 항쟁 '잃어버린 마을과 다랑쉬굴'

 

'잃어버린 마을'은 다랑쉬오름 남쪽, '다랑쉬굴'은 아끈다랑쉬오름 남쪽.

2017년 용눈이오름에서 다랑쉬오름으로 갈 때 다랑쉬굴과 가까운 곳으로 지나갔으나 전혀 알지 못했음.

'잃어버린 마을 표지석'은 다랑쉬오름에서 나올 때 발견함.

파란 선은 2017년 지나간 길임.

 

 

'잃어버린 마을 다랑쉬' 표지석 <2017년>

 

 

 

 

이번에는 남쪽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다랑쉬오름으로 갔으나 새로운 길을 내고 있어 '잃어버린 마을 표지석'을 볼 수 없었으나,

돌아 나오면서 다랑쉬굴<아래 붉은 선이 지난 곳>은 천신만고 끝에 찾아냄.

다음엔 '잃어버린 마을'과 붉은 점선으로 된 곳으로 가서 '다랑쉬굴'을 다시 가보기로 하겠음.

 

 

 

제주 4·3사건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시대 배경

광복 직후 제주사회는 6만여 명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의 창궐, 극심한 흉년 등으로 겹친 악재와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 경찰의 군정 경찰로의 변신, 군정 관리의 모리(謀利) 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 참가했던 이들의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3·1절 발포사건은 어지러운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찰 활동을 전개했고,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민·관 총파업이 이어졌다. 미군정은 이 총파업이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지만,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정책을 추진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을 모두 외지인으로 교체했고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 등을 대거 제주로 파견해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벌였다.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서북청년회(이하 ‘서청’)는 테러와 횡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했고, 구금자에 대한 경찰의 고문이 잇따랐다. 1948년 3월 일선 경찰지서에서 세 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해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해갔다.

 

경과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총성과 함께 한라산 중허리의 오름마다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12개의 경찰지서와 서청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중지,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무장봉기가 발발하자 미군정은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하고 경찰력과 서청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군대에 진압출동 명령을 내렸다. 당시 국방경비대 제9연대의 김익렬 중령은 경찰·서청과 도민의 갈등으로 발생한 사건에 군이 개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귀순작전을 추진해 4월 말 무장대측 책임자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대동청년단원이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평화협상은 결렬되고, 제9연대장은 교체되었다. 미군정은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제주에 파견하여 5·10 선거를 추진했다.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선거가 실시됐다. 그러나 제주도의 세 개 선거구 가운데 두 개 선거구가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다. 제주도가 남한에서 유일하게 5·10 선거를 거부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결국 5·10 선거 후 강도 높은 진압작전이 전개됐다.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 문제를 뛰어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포고령은 소개령으로 이어졌고,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됐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중산간 지대는 초토화의 참상을 겪었다. 11월 중순께부터 이듬 해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중산간 지대에서 뿐만 아니라 해안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4개월 동안 진행된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방화되었고, 마을 자체가 없어져버린 이른 바 ‘잃어버린 마을’이 수십 개에 이르게 된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선무를 병용하는 작전이 전개됐다.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한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고,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1949년 6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으로 희생되었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결과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 4·3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된다.
1980년대 이후 4·3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각계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0년 1월에 「4·3특별법」(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공포되고, 이에 따라 8월 28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2003년 10월 정부의 진상보고서(『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대통령의 공식 사과 등이 이루어졌다. 이후 4·3평화공원 등이 조성되었다.

진상보고서에 의하면, 4·3사건의 인명 피해는 25,000∼30,000명으로 추정되고, 강경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다. 4·3사건진상조사위원회에 신고 접수된 희생자 및 유가족에 대한 심사를 마무리한 결과(2011. 1. 26 현재), 희생자로 14,032명과 희생자에 대한 유족 31,255명이 결정됐다.

 

의의와 평가

4·3사건으로 인해 제주지역 공동체는 파괴되고 엄청난 물적 피해를 입었으며, 무엇보다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참혹한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4·3특별법 공포 이후 4·3사건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21세기를 출발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제주도는 2005년 1월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다.

<나온 곳. 다음백과>

 

 

 

16/15분                                                                                  아끈다랑쉬오름에서 본 다랑쉬오름

2017년에는 아끈다랑쉬오름을 가지 않아서 이번에 가게 됨. <아끈은 작다는 뜻>

 

 

 

 

 

 

아끈다랑쉬오름

2017년 다랑쉬오름에서

 

 

 

아끈다랑쉬오름에서 용눈이오름

아래에서 다랑쉬굴을 발견한 뒤 이 장면을 다시 보니 지금 저 멀리 펼쳐진 들판 어디엔가 다랑쉬굴이 있지 않나 함.

 

 

 

아끈다랑쉬오름 분화구. 억새로 분화구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임

 

 

 

 

 

 

아끈다랑쉬오름에서. 멀리 성산 일출봉.

 

 

 

 

 

 

아끈다랑쉬오름과 다랑쉬오름

 

 

 

아끈다랑쉬오름 분화구

 

 

 

멀리 바다 건너는 소섬<우도>. 왼쪽 오름은 지미봉인 듯

 

 

 

17/40분                                                                        아끈다랑쉬오름을 내려와서 다랑쉬굴로

 

 

 

 

 

 

이길 왼쪽이 아끈다랑쉬오름 <2017년 용눈이오름에서 다랑쉬오름으로 갔던 바로 그 길>

 

 

 

다랑쉬오름

 

 

아래 오름은 손자봉

 

 

 

 용눈이오름

 

지대가 낮아서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갈림길이 이리저리 나 있고 알f리미가 없어서 여간 어려운게 아니었다.

지난번에 갔던 용눈이오름으로 가는 길조차 여러 번 왔다 갔다 할 정도로 헷갈렸으니. 비는 조금씩 계속 내리고 있음.

 

 

 

 

 

구름에 가려진 다랑쉬오름<왼쪽>과 아끈다랑쉬오름

 

지나가면서도 마음은 온통 다랑쉬굴에 가 있다. 이 부근 어디에서 위의 두 번째 지도에 나와 있듯이 붉은 점선으로 여겨지는 곳의 고갯길을 보았다지난번<2017년>에는 다랑쉬오름으로 가면서 '다랑쉬굴'이란 알림이 없어서 가지도 못했을뿐더러 생각조차 못 했다. 그래서 무작정 논과 논을 가로질러 어느 밭둑에 올라서니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 나왔다. 거기에서 조금 앞서 처음 보았던 낮은 고갯길로 가려 했으나 길에 물이 갈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고여있어서 그만두고 돌아 나와 용눈이 오름 쪽 가는 길로 몇 발짝 떼지 않은 바로 그때였다. 아래에도 나와 있듯 다랑쉬굴 알림이 서 있지 않은가. 여태 최대의 발견. 그 순간 할 말을 잊을 정도였다. 다랑쉬굴!

  

 

 

위에서 말한 바로 그 고갯

 

 

 

18/52분                                                                                      제주 4·3유적지(다랑쉬굴)

 

 

 

 

 

 

다랑쉬굴

 

 

 

 

 

 

 

 

 

 

다랑쉬굴 구조

 

가로 18m  세로 왼쪽 13m, 오른쪽 11m, 들어가는 곳 직경 60cm, 굴 통로 2m, 통로 직경 60cm. 왼쪽 폭이 3m.

왼쪽은 생활공간으로 보이는데 천장 높이는 170cm로 구덕 선반 부엌 솥 간장 된장 항아리 부엌칼 놋그놋쇠솥가락 주걱 주전자 양푼 요강 등이 있고,

오른쪽은 높이 115cm로 주로 쉬거나 잠자는 곳으로 보임. 양쪽 다 안쪽 공간은 꽤 넓어 보임.

그 밖에 안경 가죽신 허리끈 등이 여기저기 놓여 있음.

굴의 겉모습을 보면 평범한 들판에 자리 잡고 있어서 찾아내기에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보임.   

지금과 같이 풀로 뒤덮여 있었다면. 1948년 12월 18일 겨울에 들켰으니.

굴 안 천장의 두께는? 아랫글<다랑쉬굴 2 증언 글>에서 보니 이 굴을 폭파하려다 실패한 것으로 봐서 꽤 두꺼운 것으로 여겨진다.

목숨을 조여오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이렇게 넓은 굴을 팔 수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왼쪽에 있는 이곳도 출입문인 듯

 

 

 

 

이곳은 위의 구조도에 나와 있는 왼쪽 첫머리 부근인 것 같다.

구조도에는 막혀 있는 것으로 나와 있으나 그 뒤 무슨 연유에서인지 지금은 드러나 있었다. <아래에 나오는 '다랑쉬 굴 2 증언' 글 참조>

 이 장면의 실제 모습은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위처럼 비스듬하게 누워있음. 

 

 

 

 

 

 

 

 

 

 

 

 

 

 

 

 

 

 

오른쪽 출입문

 

 

 

 

 

 

 

 

 

이곳은 다랑쉬굴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곳인 것 같다. 지름 60cm. 토벌대는 수류탄 등을 이 굴속으로 던지며 나올 것을 종용했으나

주민들이 나오지 않자 위에 나온 알림 글처럼 이곳에 불을 피워 연기를 불어넣은 다음 이곳을 봉쇄 주민 11명이 연기에 질식되어 죽음.

위의 구조도에 나온 것처럼 주민들이 왼쪽과 오른쪽 생활 공간 사이에 있는

길이 2m 통로 직경 60cm의 구간 가운데 어느 한 곳을 막아버렸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연기로 죽든 산소 부족으로 죽든. 어쩌면 모두 살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가운데 위 어두운 곳이 오른쪽 출입문 

 

 

 

 

 

 

 

 

 

용눈이오름으로 가는 길에서부터, 여기서는 잘 보이지 않으나, 여러 논을 가로질러 오른쪽 시멘트 구조물로 바닥을 깔아놓은 곳까지 옴.

드디어 다랑쉬굴을 찾음. 무논이라 신이 다 젖음.

 

 

 

 

 

용눈이오름 쪽으로 가는 길에서 언뜻 저기 맨위 조그맣게 보이는 고갯길을 발견한 것이 다랑쉬굴을 찾게 된 가장 큰 계기가 되었음.

위의 지도에서 붉은 점으로 표시한 지름길이 바로 그 길이란 것을 순간 떠올림. 지난번에는 이길 자체를 몰랐음.

 

 

고갯길<지름길>로 가려고 여기서는 보이지 않으나 위에서 보듯 오른쪽으로 들어서니

아래처럼 물이 고여 있어서 그만두고 용눈이오름 쪽으로 발길을 돌림. 

만약 저 언덕길로 계속 갔더라면. 멀리는 아끈다랑쉬오름.

 

 

 

 

  저기 나무 구조물이 다랑쉬굴 알리미. 왼쪽 아래 시멘트 바닥 구조물은 조금 앞서 논을 가로질러 올라온 바로 그곳임. 차를 세워 두기 위한 듯.

 

 

 

            아래 길은 용눈이오름으로 가는 길. 왼쪽 수풀로 가려진 곳이 다랑쉬굴. 그때에도 이 길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함.

 

 

 

다랑쉬굴이 있는 곳

위에서 말한 것처럼 천혜(?)의 조건이 갖춰진 곳으로 여겼으나.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들은 아이 울음 소리 또는 음식을 할 때 나는 연기 때문에 들킨 것으로 알고 있으나

 '제주대 미디어'에서는 굴 주변에 떨어진 똥을 보고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왼쪽<2시 방향>은 다랑쉬굴. 바로 앞 오른쪽은 용눈이오름으로 가는 길.

 

 

 

 

 

 

용눈이오름 쪽으로. 멀리 보이는 뫼가 용눈이오름.

 

 

 

 

 

 

19시 27분                               아래 포장길은 조금 앞서 다랑쉬굴로 가기 위해 논으로 들어갔던 바로 그 길. <다랑쉬오름 - 용눈이오름>

 

 

 

 

 

 

 

다랑쉬굴 1

 

1992년 제주도 구좌읍 중산간지대에 있는 ‘다랑쉬굴’에서 유골 11구가 발굴된 사건은 제주4‧3사건 당시 은신자에 대한 무분별한 작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확인 결과 이들 유해의 주인공들은 1948년 12월 18일 제9연대의 진압작전에 의해 희생된 도피 입산자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희생자들의 신원은 구좌읍 종달리와 하도리 주민들로서 그 중엔 여자 3명과 아홉 살 난 어린이도 포함돼 있어 충격을 주었다. 다랑쉬 굴 속에서는 플라스틱 안경, 흰색 단추, 혁대, 버클, 옷감, 고무신, 질그릇, 놋그릇, 놋수저, 가마솥, 항아리, 물허벅, 접시, 놋쇠로 만든 제기용 잔받침, 물통, 프라이팬, 가위, 요강, 철사뭉치, 석쇠, 화로, 구덕, 주전자, 나무주걱 등의 생활용품과 낫, 도끼, 톱, 나대, 자귀, 곡괭이, 숫돌 등 연장류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외따로 떨어져 있던 유골 1구 옆에는 그가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철모, 군화, 철창, 대검이 놓여 있었다.

 

다랑쉬굴 사진이미지 4

 

 

 

다랑쉬굴 사진이미지 5

 

 

 

<나온 곳. 비짓제주>

 

 

 

다랑쉬굴 2

 

다랑쉬굴 발굴 20주년 기념, 제주엠비씨 내부탐사 (2012)

 

 

 

다랑쉬굴 발굴 20주년 기념, 제주엠비씨 내부탐사 (2012)

 

 

 

다랑쉬굴 발굴 20주년 기념, 제주엠비씨 내부탐사 (2012)

 

 

 

-증언. 채정옥(구좌 종달, 1923년생) 증언(2001.11.15.) 
“당시 우리가 있었던 곳(다랑쉬굴)이 12월 18일날 토벌을 당해서, 토벌당시 굴 속에서 전부 희생을 당했다. 상당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토벌날(12월 18일) 당시에는 나는 굴 안에서 나와 있었다. 굴 밖에 나와 있는데, 사방에서 동시에 올라오니까, 경찰관인지 누군지 몰랐다. 그게 처음 토벌이다. 군과 경찰이 합동으로 한 토벌이다. 남은거 하나 없이 다 없애버렸다. 숨었다가, 나중에 저녁에 와서 보니, 전부 죽어 있었다.
처음에는 토벌대가 굴을 파괴할려고 했던 모양인지, 굴 위에가 막 파헤쳐져 있었다. 안에서 사람들이 나오지 않으니까, 거기다가 잡풀 부스러기를 모아다 불을 지펴서 질식시켰다. 내가 들어가서, 종달리 사람을 전부 한 줄로 눕히고, 하도 사람은 하도에서 온 분이 시체 정리를 했다. 가서 보니, 손톱이 없을 정도로 땅을 파서 죽어 있는 사람도 있었다. 총 맞아 죽은 사람은 없었다. 전부 질식사이다. 희생자들은 도피자 가족과 납치된 사람들이다.
하도 출신 오문규씨가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었다. 그분 아들이, 거기 아들도 역시 좌익인데, 국민학교 선생이었다. 부산에서 잡혀서 죽었다. 그 분 가족들이 굴 속에서 희생당했다. 그리고, 여자가 3~4명 있었다.
다랑쉬굴 희생 이후, 남은 사람들은 각자 다 피했다가, 잡혀가는 사람도 있었다. 잡혀가면, 평대인가, 함덕까지 잡혀와서 죽임을 당했다. 다랑쉬굴 사건 전에는 다 같이 지냈는데, 그 이후에는 각자 흩어졌다. 그래도, 여기 내려와도 도피자 가족이다 뭐다 해서 죽을 거니까, 그날그날 살기 위해서 소개당한 부락 같은데 가서 식량 남은 것으로 밥지어 먹고, 아는 사람들을 통해 숨어서 살았다.”

 

-다랑쉬 굴 참상 증언

다랑쉬 동굴 11명의 죽음은 토벌대가 굴입구에 화입(火入), 질식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희생자 가운데는 아홉살난 어린이도 포함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더해주고 있다. 

사망자 11명의 신원은 구좌읍 종달리 출신의 강태룡‧박봉관‧고순환‧고순경‧고태원‧고두만‧함명입, 하도리 출신인 김진생‧부성만‧이석란‧이석란의 아들 이재수 등 남자 8명, 여자 3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민보단 간부로서 이 토벌작전에 따라나섰던 오지봉씨는 “굴의 입구는 양쪽에 있었는데 토벌대가 처음엔 입구로 수류탄을 던졌고 그래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검불’로 불을 피운 후 구멍을 막아 질식사시켰다”면서 숨진 사람들은 종달‧하도리 사람들로서 여자들도 있었다고 덧붙여 ‘참상의 진상’ 실마리를 풀게했다. 

4‧3취재반은 또한 48년 11월께 산사람들에게 납치됐다가 다랑쉬 굴에서 이틀간 기거한 적도 있다는 채모씨를 찾아내 그로부터 “시신을 직접 정리했다”는 충격적인 증언을 들었다.  

채씨는 “사건이 나던 날은 12월 18일로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면서 “사건 발생 이튿날 산사람들이 주변을 확인하라며 하도리 출신 오치악과 고완규 등과 함께 보내 그 굴의 참상을 목격했었다”고 증언했다. 

채씨는 이어 “굴안은 그 때까지도 연기로 가득했는데 시신은 고통을 참지못해 돌틈이나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죽어 있었고 코와 귀로 피가 나 있었다”면서 “여자들과 어린아이를 보니 가련한 생각에 여기저기 흩어진 시신들을 나란히 누이고 나왔다”고 말했다. 

채씨는 또 ‘희생자들이 왜 그 굴속에 있었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종달리는 47년 6‧6사건의 여파 때문인지 그 후 4‧3사건이 나자 더욱 군경과 서청의 주목을 받아 일부 젊은이들이 산으로 피신하게 됐다”고 밝히고 굴 안에 총기류는 없었고 희생자들이 무장대도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몰살 모습의 유해 11구 발견

‘4‧3’ 희생자들의 원혼은 아직도 허공 중에 헤매야 하는가. 44년 전 ‘4‧3’의 회오리 속에서 집단학살된 것으로 보이는 11구의 시신들이 구좌읍 중산간 지대 자연동굴 속에서 희생된 당시의 모습으로 발견돼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유골이 발견된 곳은 구좌읍 세화리 남서쪽 6km 지점으로 해발 170m에 있는 속칭 ‘다랑쉬굴’.  

입산 주민들의 은신처로 추정되는 연장 30m의 좁디좁은 이 굴 속에는 유골  뿐만 아니라 항아리, 가마솥, 질그릇, 물 허벅, 요강 같은 생활용품과 낫, 곡괭이, 도끼 등 연장류들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어서 44년 전의 처절했던 생활상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유골들이 있는 곳에서 초록색의 녹이 슨 비녀와 여자용 버클들도 발견돼 희생자 가운데는 최소한 2~3명의 여자도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동굴은 4‧3때 중산간 지대의 없어진 마을을 조사하던 제주4‧3연구소 조사팀에 의해 1992년 3월 22일 처음으로 발견됐다. 이 소식을 접한 제민일보 4‧3취재반은 3월 29일 연구소팀과 1차 합동조사를 벌인 결과 동굴 안에 당시 무장유격대가 사용했던 총기류는 없는 반면 생활용품과 연장류 등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입산주민들의 은신처로 추정했다. 

제민일보 4‧3취재반은 인근 마을을 중심으로 탐방조사를 벌인 결과 중산간 지대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이 벌어지던 1948년 12월께 다랑쉬 굴에 숨어있던 주민들이 토벌대에 발각됐고,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질러 굴속의 사람들을 질식 몰사케 했다는 풍문이 전해지고 있음을 확인하고 구좌읍 일대를 중심으로 희생자들의 신원과 사망경위에 대한 광범위한 진상조사를 벌이고 있다.

 

-한줌의 재로 변한 유해

4‧3의 회오리 속에서 몰사당한 그대로의 모습으로 발견돼 전국적으로 충격을 줬던 구좌읍 ‘다랑쉬 굴’ 11구의 희생자 유해는 발견 45일만인 4월 15일 한줌의 재로 변해 바다에 뿌려졌다.

이날 새벽 포크레인을 동원, 그동안 콘크리트로 밀봉돼 있던 굴입구를 파헤치면서 시작된 유해 인도작업은 삽시간에 진행됐다. 유족들이 현장에 도착한 새벽 6시께는 이미 굴 속의 유해들이 수습되어 있었다.

조촐한 장례식이 끝난 뒤 새벽 7시 현장을 떠난 유해는 제주시 화장장으로 옮겨져 화장된 후 다시 희생자들의 고향인 종달리 앞바다 등지에 뿌려졌다.

다랑쉬 굴은 유해들이 밖으로 나온 뒤 굴 속에 유물들을 그대로 남긴 채 다시 밀봉됐다.

 

-취재수첩. 결국 바다에 수장

‘4‧3’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경토벌대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한 구좌읍 ‘다랑쉬 굴’ 11구의 유해는 결국 불에 태워져 바다에 수장됐다.

“언제 어디서 돌아가신 줄도 모르다가 44년만에 기적적으로 찾게 된 조상의 유골인데 이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니 기가 막힐 뿐입니다. 외부의 압력이 없었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15일 오후 2시 김녕리 앞바다, 한줌 재로 남은 뼛가루를 바다에 뿌리던 후손들은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면서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이는 “매장을 권유함에도 불구하고 유족들이 한사코 화장을 주장했다”는 행정당국의 발표와는 너무도 거리감이 있는 말이었다.

<나온 곳. 제주4·3아카이브>

 

 

 

2017년에도 만났던 바로 그 나무이건만

 

 

 

 

 

 

용눈이오름

 

 

 

 

 

 

19시 35분. 용눈이오름. 이 오름에서 다랑쉬오름으로 가는 도중에 다랑쉬굴로 가는 사잇길<지름길>이 있으나 여기서는 이를 밝히지 않아 나도 그렇게 하겠음.

이 글을 보면 쉽게 찾을 수 있지 않을가 한다. 20시 반 무렵 겨우 제주시로 가는 버스를 탐. 비는 더 세게 내리고 있음.

 

 

 

 

 

 

5/28일. 화. 날씨 아주 좋음. 돌아오기 아까울 정도이다. 어제 6부두 비록 배는 끊어졌으나 예약은 했다. 오늘 가니 2부두에서 12시에 고속으로 가는 배가 있다 해서 그리로 갔다. 시속 80km. 13시 30분 완도 도착. 그럼 제주 완도 거리<거리는 속도×시간이므로??>는 대충 120km. 17시 30분 서울 감.

 

 

07시 40분

 

 

 

제주항으로 가기 위해 시외버스 역으로 가면서 한라산

 

 

 

 

시외버스 역에서

 

 

 

13/45분. 완도항 13시 30분 정확히 도착

 

 

 

 

 

 

18/35분. 버스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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