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고흥 <소록섬 6>

아리1 2019. 5. 9. 18:11

2019. 03. 24일. 일. 땅이 작은 사슴과 닮았다 하여 지은 이름, 소록섬. 소록도 자료관. 본관<박물관> 못지않게 잘 꾸며져 있었음. 소록도를 마치고 과역으로 가서 소머리<우두>마을로 감.

 

 

 

 

 고흥군 소록도 거금도

 

 

 

소록도 자료 제1관 알림

 

제1 자료관은 원생자치회의 전신인 문예실로 사용되었는데, 1975년 화재로 문예와 예술품 등 귀중한 자료들이 불에 탐.

<안내와 역사. 둘다 왜놈식 한자어. 우리는 언제나 왜놈이 지어준 말 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소록도 자료관

 

 

 

연혁 <1915 - 2016년까지>

 

 

 

1915 - 1953년

 

 

 

1954 - 1977년

 

 

 

1978 - 2016년

 

 

 

소록도 자혜의원과 2016년 입퇴원 한자 수 <입원; 남 25, 여 16명, 퇴원 및 사망; 남 39, 여 33명. 총환자수;519명. 남;270, 여;249명.

2015년은 550명. 남;281, 여;269명. 두 해를 비교해 보면 31명이 줄어듦>

 

<오른쪽 아래는 지금의 소록도 병원. 일반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함> 

 

 

 

소록도

 

 

 

1.십자봉 2.교도소 3.화장장<세번째 죽음> 4.자혜의원 5.서생리 6.종각 7.만령당<납골당> 8.남생리 9.등대 10.식량창고

11.순바구길 12.양지마을 13.중앙공원 14.운동장 15.녹생리 16.신생리 17.새마을 18.중앙 19.의료본관(?) 20.한센병 자료관

 21.생활자료관 22.동생리 23.감시봉 24.해수욕장 25.관사지대 26.신사 27.순록탑 28.나루(?)

 

 

 

한센인의 수난  

 

 

1.다미안재단의 의료활동 2.1935년 환자들의 고기잡이

 

3.소록도에 온 미나미 총독<소록도 1에서 이놈에게 아주 심한 욕설을 해주었는데 바로 그놈이 총독이었다니.  "불편한 몸으로 오랫동안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능지처참해도 시원찮을 개돼지보다 못한 왜구 개돼지 새끼들. 특히 바로 앞에 있는 개돼지 새끼" 이렇게. 아래 사진> 이때 이춘상 의거가 일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한센병 환자들이 이놈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다.

 

4.1940년 14회 왜나학회 기념사진 5.1940년 중앙공원 정원석 운반작업 6.60년대 환자들의 작업 7.원생들의 작업

8.동생리 나루터<선착장은 왜놈식 한자어> 공사장면<1939년> 9.연탄 운반 작업 10.탈출 11.원생 주거지역

12.치료본관<강점기> 13.원생들의 세탁작업 14.디디에스 투약 장면<1958년> 15.국제 워크 캠프단

 

 

바로 이 장면<소록도 1에서>

 

여기서 미나미에 대해 좀 더 알아보면,

제7대 두목미나미 지로 <육군 대장. 1936년 8.5일 ~ 1942년 5월 29일. 가장 악질 깡패 두목 가운데 한 놈> 우리말 금지. 왜놈식 이름 강요<창씨개명, 위안부는 왜놈이 쓰던 왜놈어> 등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민족말살정책을 폄.
국민 총력운동과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을 전개해 한국민들을 기만적인 황민의식 아래에서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조선교육령을 개정해 민족의식의 말살과 황민화를 꾀했다. 또한 모든 행사에 앞서 '황국신민서사'의 제창을 강요했다. 이를 기반으로 지원병제도를 실시해 많은 청년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었으며, 국민징용법에 따라 많은 한국인을 강제 징용했다.

한편 '선만일여'(鮮滿一如)란 표어 아래 만주의 관동군과 경제·문화·치안 등 모든 부문에 걸쳐 긴밀한 협조 관계를 구축했다. 1942년 5월 조선 총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1945년 종전 후 전범으로 국제군사재판에서 종신금고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1954년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이듬해 죽었다. <다음 백과에서>

 

*이춘상 의사가 원장 가운데 가장 악질 원장 스오를 처단한 것이 1942년 6월 20일이었으니까 어쩌면 깡패 두목 가운데 가장 악질 깡패 두목 미나미를 처단할 충분한 기회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참으로 원통하고도 원통하다. 

 

 

 

 

플로렌스 나이팅 휘장<기장은 왜놈식 한자어랍니다.> 소록도 사람들이 펴낸 책들. 원생들을 위한 교육기관

 

 

 

원생들을 위한 교육기관과 그들이 그린 그림인 듯 <녹산초등학교. 녹산중학교. 성실고등성경학교>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소록도 방문. 순록탑.

오마도 간척공사<지난 회에도 보았지만 왜도 아닌 광복 뒤 이 나라 정권에서 몸도 좋지 못한 환자들을 상대로 한 대사기극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소록도 방문. 1984. 5. 4일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5월 4일 소록도를 방문하였다.

교황은 중앙운동장에 모인 환영 인파를 축복하고, 행사장에서는 "참다운 하해의 정신"이란 주제의 강론으로 원생들을 위로하였다. 

소록도에서는 '영적 꽃다발과 칠보성장', 그리고 원생들이 그린 산수화를 선물하였고, 교황은 십자상과 2만 5천 달러의 성금으로 이에 답례하였다.

교황의 방문에 즈음하여, 병원에서는 그간 원생들이 섬을 출입할 때 따로 이용하던 나루와 선박을 없애고 직원을 비롯한 일반인들과 같은 선창, 같은 배를 이용하게 함으로써 일반인과의 차별을 없애기 시작하였다.

 

 

교황이 한국어로 읽은 인사말<교황 소록도 방문 사진 옆 붉은 네모 안 글>

 

"마음으로 친애하는 여러분!

머나먼 길을 떠나 한국에 올 채비를 하면서, 이 소록도에 계신 여러분과 만남을 특별히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서 아름다운 글을 받은 뒤로는, 더더욱 여러분을 보러 오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과 함께하고, 여러분을 위로하고, 여러분에게 내 사랑을 전하고 싶어서습니다."

 

 

순록탑

육이오 동란 가운데 6천여 원생들을 보호하다가 인민군에 끌려가 학살된 10명의 직원과 1명의 목사를 추모하기 위한 탑으로서, 1978년 5월 17일 독지가의 지원과 직원 및 원생들의 노력 봉사로 소록도 초입 나루터에 세워졌다.

탑의 규모는 아래 부분의 받침대가 가로 5미터, 세로 1미터이며 그 위의 두 기둥은 높이가 5미터이다.

가운데의 두기둥은 순직한 11명을 상징하는 아라비아 숫자를 뜻하며 윗부분의 둥근 폭탄 모양의 조형물은 전쟁을 뜻한다.

순록이라는 탑 이름은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사슴섬을 지키다 순직했다는 뜻이다.

앞면 좌우에는 비문과 순직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소록도 간척 공사는 앞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가장 끝부분 글만 알립니다.

"오마도는 끝내 피와 땀의 보람도 없이 「당신들의 천국」으로 남아, 지금도 바다 건너 소록도를 바라보고 있다."  <윗글에서>

 

 

 

월례 정기면회<수탄장>

 

 

 

원생들의 참사<이것도 왜 강점기가 아닌 1945년 8월 22일 광복 7일만에 자치권 요구 협상 대표자 84명 학살>

 

광복으로 왜놈들에게 넘겨받은 병원 운영권을 차지하기 위한 의사와 행정직원들과의 세력다툼이 있었고, 직원들 사이의 투표에 의해 오순재가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에 투표에 진 의사 석사학은 원생들을 배경으로 하여 운영권을 빼앗을 욕심으로 원생 대표 이종구에게 '운영권을 장악한 자들이 원생들의 식량과 의약품 등을 섬 밖으로 빼돌리려 하니 이를 막아야 한다'고 거짓 정보를 흘렸다.     

이 소식을 듣자 극도로 흥분한 원생들은 자신들에게 배급될 물품 창고를 자신들이 지켜야 한다며 몽둥이, 괭이와 삽 등 농기구를 들고 직원 지대 초입으로 몰려와 함성을 지르며 시위를 벌였다.

사태가 급박함을 느낀 직원들은 원생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공포를 쏘아 위협을 했으나 수많은 원생들이 계속 소리를 지르며 돌진해오자 이들을 향해 사격을 가했고 앞에 있던 몇 명이 쓰러지자 원생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험악한 순간이 지나자 직원대표 오순재는 자진하여 나온 원생대표 이경도와 다음 날 자치 문제 등 원 운영 전반에 걸쳐 토의하자는 협상안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광복 뒤 혼란한 상태에서 광복 앞과 같은 언동으로 원생들을 대했던 간호부 박진각이 원생들의 집단 뭇매로 숨진 사건이 있었고, 원의 운영을 원의 자치제로 해달라는 요구를 거절하자 이에 반발한 원생들이 형무소를 파옥하고 나온 수형자들과 직원을 습격하여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집단행동에까지 이른 원생들에게서 위기감을 느낀 직원들은 고흥 치안유지대에 지원을 요청하여 협상을 위해 나온 원생대표들을 결박하여 모두 사살하였고 마을에 숨어든 원생대표들도 찾아내 모두 사살하였으며, 치료 본관 앞 모래밭 구덩이에 시체를 모아 장작을 쌓고 송탄유<松炭油>를 부어 시신을 불태웠다.   

이 사건으로 90명의 각 마을 원생 대표 가운데 84명이 희생되고 6명만이 살아남았다. <윗글에서>

 

 

 

이춘상 의거<李春相. 스오 뱃속에 부엌칼 깊숙히 넣어두다.> 원생들의 노동과 수난

 

 

 

 

 

 

자료 1, 2 전시관

<출입은 한자어. 출입구는 왜놈식 한자어>

 

 

 

<앞서는 병과 싸우며 향학열을 불태우던 녹산중학교 건물이었음>

 

 

 

한센병 개요

 

1.역학

한센병은 한센균 때문에 발생되는 면역학 질환이다. 아직 명확히 규명되지는 않았지만 대개 호흡기로 감염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센균의 잠복기는 수 년에서 수십년 정도로 길며 환자의 면역 상태에 따라 다양한 증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센병에 걸리지 않으며 한센병에 대한 면역력이 약한 극히 일부 사람에서만 발병하는 질병이다. 그러므로 일반 사람들은 한센병 환자들과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2.임상증상

한센병에 대한 증상은 한센균의 면역 상태에 따라 다양하지만 대개 1.감각의 저하 2.말초신경의 비후<肥厚>와 통증 3.한센균의 존재라는 3대 징후가 있다.

감각이 저하된 피부반점, 결절, 신경손상, 눈썹소실, 손발의 감각소실, 토안<兎眼>, 실명 등 여러 증상이 나타나며 치료하지 않을 경우 다양한 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

 

3.진단

한센병의 진단의 환자의 피부병변, 운동신경검사, 감각신경검사, 신경촉진 등 이학 검사와 한센균을 관찰하는 피부도말검사, 피부조직 병리검사로 기본 진단을 한다. 그밖에도 레프로민 검사, 피지엘-1 항체검사, 분자생물학 검사 등 다양한 방식이 사용된다.

 

4.치료

한센병은 천형의 병이 아니라 약물로 치료되는 전염병에 지나지 않는다. 병에 걸렸더라도 2주에서 2개월 정도 약을 먹으면 다른 사람에게 병을 옮기지 않으며, 병형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5년에서 20년 정도 꾸준히 약을 먹으면 완전히 낫는다.

한센병 치료는 한센병 자체의 치료와 한센병에 대한 후유증의 치료로 나눌 수 있는데, 소록도 병원 입원자 대부분은 한센병의 후유증에 대한 재활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요즘은 의학의 발달로 한센병에 의한 장애는 거의 없으며, 대표 치료약은 답손, 클로파지민, 피팜피신 등이 있는데, 한가지 약보다 몇가지 약을 복합해서 쓰는 복합화학요법<엠디티>을 쓰고 있다.   

 

 

약품

1.림프렌 캅셀

2.탈리도마이드

3.오프신<ofloyacina>

4.미노신; 한센병균의 단백질 합성을 방해한다. 살균력이 있으나 오프신<ofloyacina>보다 덜하다. 부작용으로는 피부 색소 침착, 위장장애, 신경장애 등이 있다.

5.디디에스 정; 1941년 이래 한센병의 치료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지금도 세계에서 효과를 인정받고 있다. 1960년대에는 내성균이 출현하기도 하였으나 이 약을 지시대로 복용한 환자는 음성치유가 되었다.

6.리팜피실 캅셀; 강력한 살균 작용이 있는 리팜피신은 DDS. 내성균이 재발하던 1970년대 이래 한센병 치료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오늘날 복합화학요법<엠디티>의 필수약품이다. <윗글에서>

 

 

 

 

 

 

우리나라 한센병 관리사

 

1. 1450. 제주도에 치료소 설치<조선 세종대왕>

2. 1909. 어빈 부산 나병원 설립

3. 1916. 전라남도 소관 소록도 자혜의원 설립

4. 1933. 7. 7. 영친왕, 조선 나예방협회에 매년 2만 씩 3년간 총 6만원 하사 결정

5. 1958. 8.11. 대한나협회 창립

6. 1961. 10. 정착사업 개시

7. 1963. 2. 7. 전염병 예방법 개정, 강제 격리 폐지 . 재가<집>치료로 전

8. 1982. 복합화합요법<MDT> 도입

9. 1985. 10. 25. 나화학요법 표준처방 제정

10. 2000. 8. 1. 전염병예방법 개정. 나병을 한센병으로 이름 바꾸고, 법정 제3군 전염병으로 규정 <위에 나온 표에서 일부만 씀>

 

 

 

 

 

 

한센병 관리 체계

 

 

 

 

 

 

한센병 관리 환경의 변화. 정착촌 사업

 

왼쪽 아래 지도, 한센 등록자, 정착농원 및 보호시설 분포도

작은 점; 정착 마을, 붉은 표시; 국립소록도 병원,

점; 생활시설 <대구애락원, 성나자로마을, 산청성심원, 애양평안 요양소, 다미안의 집, 안동 성좌원>

지도밑 '1'은 자불소독기<1960년 대>; 주사기, 주사침 등을 소독했던 전기소독기

 

 

 

한센병 관련 저서

 

 

먼저, 위에 나온 사람부터 보면

 

맨 왼쪽. 윌슨<R.M.Wilson, 1880-1963> 선교사. 1911년 광주나병원을 설립하는 등 구라사업에 헌신하였다.

김교신<1901-1945> 월간(?) 성서00 출간(?). 1933(?)부터 1940년까지 이 잡지를 통해 소록도 원생들에게 ...... 그들의 신앙(?)간증, 서신(?) 등을 게재하여 원생들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최흥종<1988-1966> 목사. .............. 광주(?)에 한센병 환자 수용소를 설립하는 등 구라운동에 헌신하였다.

 

 

관련 저서

 

사슴의 마을<김지연, 은영사, 1970>

-지은이가 소록도에 머물면서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여러 이야기를 쓴 소설

 

영원한 자유인<오방선생기념사업위원회, 광주 YMCA, 1976>

-광주 개혁의 선각자요, 광주 YMCA 창설자로서 복음전파, 한센병 환자 구호사업의 전개 등 사회운동의 선구자인 오방 최흥종 목사의 생애를 기록

 

*오방(五放)  최흥종(1880∼1966) 선생은 ‘걸인과 한센인의 아버지’로 평생을 살았다. 한국 최초 한센인 치료시설인 광주 나병원을 설립(1911)했고, 광주YMCA를 창설(1920)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만세시위 사건으로 3년 동안 옥고를 치른 후 광주 북문 밖 교회의 목사로 활동했다. 신간회 전남지회장을 역임했고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회장을 지내는 등 광주를 대표하는 사회운동가로 활동했다.

최 선생이 별세한 1966년 5월14일에는 광주의 모든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져 ‘광주사회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됐다.
정부는 1962년 최 선생의 업적을 기려 애국훈장을 수여하고 1986년과 1990년에는 각각 대통령 표창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한 바 있다. 지난 2010년에는 무등산 증심사 오방정(현 춘설헌)에 오방 선생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사)오방기념사업회는 그의 업적을 돌아보는 만화를 제작하고 정기적으로 세미나를 열고 있다.
기념관에는 독립유공자 공훈록,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 마포형무소에서 받았던 형 집행 판결문 등 70여점이 전시된다. 오방 선생이 시베리아 선교를 갔을 때 지녔던 러시아어 성경과 김구 선생이 오방에 써준 ‘화광동진’ 액자도 전시물에 포함됐. <광주일보. 2019. 4. 12일>

 

한하운 명시<한하운, 한림출판사, 1979>

-파랑새, 절라도 길, 보리피리 외 51편의 시에 한센병 환자의 한이 담긴 주옥같은 시집

 

솔바람 물결소리<남지심, 동아일보사, 1982>

-한센병 환자를 부모로 둔 한 소년이 구도자의 길을 걷게 되면서 00000 마을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는 불교 소설

 

섬<윤정모, 도서출판 한마당, 1983>

-지은이가 한 때 소록도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경험을 살려 소록도의 풍경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장편 소설

 

아테네 가는 배<정소성, 고려원. 1987>

-한센병 환자 부부가 무인도에서 사회와 격리되어 일궈가는 가슴 아픈 삶을 담은 소설

 

김교신과 문둥이<신정식 정리, 1989>

-김교신 선생의 글, 일기, 한센병 환자들의 글을 통해 선생과 한센병 환자들 사이에 이루어졌던 유대를 정리한 책

 

그리고 함성이 들렸다<윤정모, 성현출판사, 1990>

-1939∼1945년을 배경으로 소록도 원생들의 수난사를 다룬 장편소설

 

문둥이의 딸<이숙자, 모음사, 1991>

-아버지가 한센병 환자인 딸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사를 그린 소설 

 

보리피리<한하운, 문지사, 1991>

-한센병자의 아픈 울음으로 못다한 한을 보리피리 불며 살다간 파랑새 시인 한하운의 시집

 

몰래 익은 포도송이<김두애, 도서출판 신애, 1992>

-30여년간 소록도에서 목회자 생활을 중심으로 쓴 지은이의 전기집 

 

분홍섬<공세동, 정민, 2000>

-스님이 된 생모와의 만남 뒤에 죽음으로 이어지면서 슬픔과 괴로움을 함께 한 애인마저 병을 얻어 분홍섬인 소록도로 보내야만 하는 한 젊은이의 애련함을 담은 소설. 그밖에

 

 

 

수술용 기구

 

 

 

 

 

 

 

 

 

 

 

<소록도 5>에서 1960년대 오스트리아 출신 간호사인 마리안느 스퇴거와 마가렛 피사렛의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활동을, 이번에는 강점기 서서평 선교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서평<徐舒平>

 

본 이름은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 <Elisabeth Johanna Shepping>
독일 출신의 미국 선교사 서서평은 일제 강점기였던 1912년에 미국 남장로회의 선교간호사로 조선에 들어와 1934년까지 22년 동안 병자와 여성들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그녀는 소록도에 나환자 요양시설을 만들게 한 장본인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막연하고도 근본적인 질문에 대하여, 톨스토이는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라고 대답했다.

일찍이 세르비아 출신의 테레사 수녀는 그 사랑을 가슴에 품고 콜카타의 빈민가에서 소외 받은 채 죽어가던 사람들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인도를 넘어 세계인의 성녀로 추앙받았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마더 테레사보다 18년 앞서 서럽고 외로운 이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던졌던 백의의 천사가 있었다.

 

엘리자베스 셰핑, 한국 이름 서서평이 바로 그 장본인이다. 독일 출신의 간호사 서서평은 일제 강점기인 1912년 개신교의 의료선교사로 조선 땅에 건너와 생을 마칠 때까지 병자와 여성들을 돌보았으며 열악한 교육환경과 인권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조선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리하여 미국 장로회는 1930년대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 중에 한 명으로 그녀를 선정했다.

서서평에 대한 최초의 자료는 백춘성 장로가 저술하고 대한간호협회가 1980년에 발간한 그녀의 일대기 천국에서 만납시다》이다. 이 책에는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교육 받고 개화기 조선 땅에 들어와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3.1운동 이후 군산, 광주 등지에서 간호학교 설립, 육아사업, 윤락여성 구조, 빈민구제 등에 헌신했던 그녀의 업적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2017년 4월에는 다큐멘터리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가 개봉되어 그녀의 진정한 사랑과 신앙의 삶을 세상에 전했다.


바람과 햇살과 숲을 사랑한 소녀

서서평(徐舒平)의 본명은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Elisabeth Johanna Shepping)이다.
1880년 9월 26일 독일 남부의 휴양도시 비스바덴에서 미혼모 안나 셰핑의 딸로 태어났다. 당시 숙박업소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안나가 독일인 남성과 관계를 맺고 원치 않았던 아이로 태어난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세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 안나는 딸을 버리고 혼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버렸다.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엘리자베스는 할아버지 안드레아스 셰핑과 할머니 엘리자베스 화버의 품에서 자랐다. 그녀는 불우했지만 몹시 명랑한 성격이어서 고향의 부드러운 바람과 반짝이는 햇살, 녹음이 우거진 숲을 사랑했다고 한다. 그녀는 특히 쏟아지는 빗속에서 춤추는 것을 좋아했다.

 

아홉 살 때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엘리자베스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그녀는 새로운 생활을 하고 있던 어머니로부터 배척당하자 마음에 상처를 담은 채 가톨릭 미션스쿨에 들어갔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간호사가 되기 위해 성마가병원 간호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간호전문학교 졸업반이 되자 엘리자베스는 뉴욕시립병원에서 실습을 받았다.

 

그때 동료 간호사를 따라 장로교회의 예배에 참석하여 감명 받은 그녀는 전통적인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했다.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브루클린 주에 있는 이시병원에 근무하며 근처에 있는 유대인 요양소, 이탈리아 이민자 수용소 등지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1904년부터 그녀는 뉴욕의 성서교사훈련학교에서 운영하는 ‘여행자를 돕는 선교회(Traveler's Aid Missionary)’에서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에 나섰다.

 

1911년, 엘리자베스는 동료 선교사 포사이더(Forsythe)로부터 삶의 전환점이 되는 소식을 들었다. 태평양 건너에 있는 조선이란 나라가 있는데 의료시설이 부족하고 위생관념조차 없어서 수많은 환자들이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길가에 버려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엘리자베스는 고통 받는 조선인에 대한 헌신이야말로 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소명이라고 여기고 남장로회에서 파송하는 해외선교사로 자원했다.


간호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다
32세 때인 1912년 2월 20일, 엘리자베스는 조선으로 향하는 여객선 코리아호(S.S.Korea)를 타고 20여 일 동안의 기나긴 항해 끝에 생면부지의 땅 조선에 도착했다. 그때부터 엘리자베스는 사람들과의 자유로운 소통을 위해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고, 본명과 발음이 비슷하게 서서평(徐舒平)이라는 한국식 이름까지 지었다.

 

입국 초기에 서서평은 선교회의 지시에 따라 서울에 있는 세브란스병원에서 간호사 양성과 기독교 선교 활동에 투입되었다.

1919년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서서평은 일제의 만행으로 부상당한 조선인들을 치료해 주고 투옥된 독립 운동가들의 옥바라지를 해주었다.

 

그로 인해 일제로부터 서울 활동이 금지되자 광주에 내려가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제중원의 간호사로 일했다. 그때부터 서서평은 전주와 군산, 광주 등지를 오가며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여성들에게 성경과 실과 등을 가르쳤다. 군산의 구암예수병원에 근무할 때는 뛰어난 기획력과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다른 병원에 비해 한국인 조수, 입원 환자 수, 진료횟수 등에 있어서 월등히 높은 성과를 보였다.


'큰 년’과 ‘작은 년’에게 이름을 지어주다

일제 강점기 서서평이 바라본 조선의 현실은 실로 비참했다. 그녀가 활동하던 광주와 전남 지역은 1930년 기준으로 볼 때 전체 45만 가구 220만 인구 가운데 빈곤층이 88만 명이었고, 걸인이 11만 명에 달했다. 당시 서서평은 남존여비의 그릇된 풍습으로 인해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있던 조선 여성들에게 주목했다. 그녀가 만난 많은 여성들이 질병에 시달리거나 굶주리고 있었으며 소박맞아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서서평은 그녀들을 구제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교육과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1년 중 100여 일 동안 말을 타고 전라남북도는 물론 제주도까지 건너가 병자들을 돌보고 핍박 받는 여성들을 가르쳤다.

 

당시 서서평은 이름조차 없는 여성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가르치면서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일깨워 주었다.

1921년에 그녀가 내쉬빌 선교부에 보낸 편지에는 조선 여성들의 열악한 처지와 자신의 보람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여성 500명 중 이름이 있는 사람은 열 명 뿐입니다. 조선 여성들은 ‘돼지할머니’, ‘큰 년’, ‘작은 년’ 등으로 불립니다.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주는 것이 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


1922년 서서평은 미국인 친구 로이스 닐(Lois Neel)의 후원을 받아 1922년 한국 최초의 여성 신학교인 이일학교(Neel Bible college)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현재 전라북도 완주에 있는 한일장신대의 전신이다. 그 후 서서평은 이일학교 학생들과 함께 농촌 봉사활동에 나서 매년 3만~4만 명의 여성들을 교육시켰다. 그녀는 또 부인조력회와 조선여성절제회, 조선간호부회, 여전도회연합회 등을 창설하여 여성의 권리와 보호에 진력함으로써 조선의 여성운동과 간호계, 개신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23년 조선간호부협회를 세운 뒤에는 일본과 별개의 단체로 국제간호협의회(ICN)에 등록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직시한 그녀는 조선 여성들에게 성경의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독립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 애썼다.

 

훗날 한 일간지에서는 이런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에 경의를 표하며 오만한 일부 선교사들과 신여성인 체하며 사치를 일삼는 여성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서 양은 생전에 ‘다시 태어난 예수’로 불렸다. 백만장자처럼 하인을 두고 차를 몰고 다니는 선교사들, 동족의 비참에 눈감고 개인 향락주의로 매진하는 신여성들이 양심에 자극을 받길 바란다.


조선의 여성운동에 앞장서다

서서평은 당시 동양인을 미개인 취급 했던 다른 선교사들과 달리 한국의 자연과 문화를 진정으로 사랑했다.
평소에 그녀는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색 통치마를 입었고, 남성용 검정고무신을 신었으며, 음식도 된장국을 좋아했다고 한다.

 

1925년 1월 17일 서서평은 광주기독교청년회에서 주최하고 반금정예배당에서 열린 인도(人道)문제강연회에서 3백여 명의 청중들에게 ‘금주 문제에 대하여’라는 제하의 계몽 강연을 했다.

 

1926년에 한 신문기자는 그녀에 대하여 ‘사랑스럽지 못한 자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고, 거칠고 깨진 존재를 유익하고 아름다움을 지닌 기독교인으로서 단련된 생명체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서서평의 열정’이라고 썼다.

 

그 무렵 남장로회 소속 미국인 선교사들은 한 달 생활비로 3원을 받았다. 그런데 서서평은 자신을 위해 10전<*1원=10환, 1환=10전, 1원=100전. 지금은 환시장에서나 쓰이고 있음. 2019. 5/13일. 월. 1USD=1208.28 원. 1달러에 1208원 28전. 또는 1208원 2환 8전. 10전이면 1환 또는 0.1원. 10전을 썼다면 받은 월급의 1/30을 씀. 지금 월급 100만원이라면 33,333원. 하루에 1,110원>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빈민과 병자, 여성들을 위해 사용했다. 그들을 위해서는 어떤 어려움에도 좌절하지 않았다.

 

광주 양림동에서 여성들의 자립을 위해 양잠업을 지도하던 중 시설이 비좁고 뽕나무가 부족하자 미국 선교부에 기금을 요청했고, 제주도에서는 빈민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 고사리를 캐기도 했다.

 

1929년 서서평은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 안나 셰핑을 만났다. 그런데 매정한 어머니는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것도 모자라 고된 선교사 생활로 인해 거지꼴이 된 딸을 몹시 부끄러워하며 외면해 버렸다. 서서평은 평생 세 차례나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았다. 세 살 때 어머니는 그녀를 버리고 미국으로 이민 갔으며, 청소년 시절 미국에 건너가 어머니를 만나려 했지만 쫓겨났고, 선교사가 되어 잠시 귀국했을 때 어머니를 만났지만 초라한 행색의 딸을 어머니는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서서평은 그런 내면의 아픔을 신앙과 인간애로 승화시켜 조선의 자식들에게 더 큰 사랑으로 전해 주었다.

 

출생의 비천함과 소외감을 긍정적인 삶의 태도로 변화시킨 서서평은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그녀의 따스한 손길은 미혼모, 고아, 나환자, 노숙인 등을 가리지 않았다. 그녀는 또 수양딸 13명과 나환자의 아들 1명 등 한국 어린이 14명을 입양하여 훌륭하게 키워냈고, 시대가 외면하던 과부 38명을 자립시켜 새 삶을 살도록 해 주었다.

 

1932년 6월 10일 이일학교에서는 서서평의 선교 20주년 기념식을 열어 그녀의 노고를 위로했다.


1933년 그녀는 나환자 530명을 이끌고 서울에서 행진을 벌였다. 일제 총독부의 나환자 정관수술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총독부는 정관수술 정책을 폐기하고 소록도에 갱생원을 지어주기로 약속했다. 그때부터 서서평은 ‘나환자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버림받은 자들의 어머니

1934년 6월 26일, 서서평은 광주에서 만성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인해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동아일보는 1934년 6월 28일자 기사에는 ‘이국분투 25년 자선, 교육 사업에 일생 바친 빈민의 자모 서서평 양 장서’란 제하에 다음과 같이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광주읍 양림정에 있는 이일학교의 설립자이며 교장인 서서평 양은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 조선에 들어온 이후 선교 사업은 물론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사회사업과 교육 사업에 노력하여 오던 중 1922년에는 이일학교를 창립하야 우금 13년 동안에 성경과 36명, 과학과 37명의 졸업생을 내었으며, 방금 66명의 재적생이 있었다 한다. 이 학교는 이혼 당한 여자, 남편이 죽고 없는 여자, 학령이 초과한 여자 등을 교양하여 왔었는데 동 서서평 양은 학교 창설 이래 자기의 생활비 일체까지 학교 유지비에 바치었으므로 사생활은 극도로 곤란하였다 하며 무너진 주택을 수선할 여유조차 없었다 한다. 그러던 중 지난 26일 오전 4시에 드디어 이 세상을 떠났다는 바 그 장의는 전 광주기독교단체 연합장으로 성대히 거행하리라 한다.

 

22년 동안의 헌신적인 삶을 접은 서서평의 유산은 담요 반 장,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뿐이었다.


그녀는 임종에 앞서 자신의 시신을 의학용으로 기부하기까지 했다. 텅 빈 그녀의 침대 맡에는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ice)’라는 좌우명이 걸려 있었다. 동료 선교사들은 ‘한국의 메리 슬레서’를 잃었다며 몹시 슬퍼했다. 메리 슬레서는 나이지리아에서 고아들을 돌보다 숨져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어머니’로 추앙받은 선교사이다.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진 서서평의 장례식에는 수천 명의 광주 시민과 나환자들이 참석하여 ‘어머니!’를 외치며 오열했다. 이일학교 여학생들이 운구행렬을 시작하자 수많은 여성들이 소복을 입고 뒤따랐다. 그렇듯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았던 엘리자베스 셰핑은 사고무친한 조선 땅에서 모든 버림받은 자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다음 백과에서>

 

 

 

 

<다음의 TIP에서>

질문;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산 사람?

답; 서서평님을 소개드리고 싶습니다.

 

“1934년 6월 서서평 선교사는 광주에서 만성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숨졌습니다. 그녀가 남긴 건 담요 반 장,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뿐이었습니다. 한 장 남았던 담요는 이미 반으로 찢어 다리 밑 거지들과 나눴습니다. 시신도 유언에 따라 의학연구용으로 기증됐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 조선에서 22년간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고무신을 끌고 다니며 ‘조선인의 친구’가 아니라 그저 ‘조선인’으로 살았던 사람. 가난하고 병든 이웃, 나환자들을 죽기까지 섬겼던 그 사람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살아왔습니다….”

 


서서평(본명 엘리제 셰핑·1880~1934) 선교사 기념사업 경과보고를 하던 양국주(63) 씨가 잠시 울먹였다. 17일 광주광역시 양림동 기독간호대학 안 오웬기념각. ‘서서평 선교사 내한 100주년<2016년이니 2019년 지금은 103주년> 기념 예배 및 서서평 평전 출판 기념회’에 모인 1000여명의 사람이 여기저기서 함께 눈가를 훔쳤다.

 


독일 출신 미국인인 서서평 선교사는 1912년 32살의 나이에 처음 조선에 온 처녀 간호 선교사였다. 당시 조선은 나라를 잃은 슬픔 속에 제 백성 돌볼 엄두도 못 내던 나라였다. 그녀는 끊임없이 병고에 시달리는 몸으로 광주 제중원 등을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와 제주도를 끊임없이 순회하며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가난한 여인들을 가르쳤다.

 

◇14명의 양자·양녀, 38명의 과부 거둬
서서평이 바라본 조선 땅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 번 순회 진료와 전도 여행을 나서면 한 달 이상 말을 타고 270㎞ 이상 거리를 돌았다. 진흙탕에 말이 쓰러지면 머리에 이고 백릿길을 걸었다.

 


“이번 여행에서 500명 넘는 조선여성을 만났지만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열 명도 안 됐습니다. 조선 여성들은 ‘돼지 할머니’ ‘개똥 엄마’ ‘큰년’ ‘작은년’ 등으로 불립니다. 남편에게 노예처럼 복종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아들을 못 낳는다고 소박맞고, 남편의 외도로 쫓겨나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팔려 다닙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주는 것이 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1921년 내쉬빌 선교부에 보낸 편지)

 


서서평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국 최초의 여성신학교인 이일학교(현 한일장신대의 전신)를 세워 여성들을 가르쳤다. 조선간호부협회(현 간호협회의 전신)를 세우고 일본과 별도로 세계 간호사협회에 등록하려 애썼던 이도 서서평이다. 한글 말살정책이 진행 중인 일제 치하에서 간호부협회의 소식지와 서적들은 모두 한글 전용을 고집했다. 조선사람들에겐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독립의 확신을 심어주려 애썼다.

 

 

 

1914년 광주 제중원 여성 성경공부반의 조선 부인과 함께 선 서서평(엘리자베스 셰핑) 선교사. 독신 여성 간호 선교사로 조선 땅에 와서, 한복에 고무신을 신고 평생 병들고 가난한 조선인과 나환자들을 섬기며 살았다. /Serving the People 제공

 

◇출애굽 정신 가르치며 한글 사용 고집
1929년 조선간호부협회를 세계협회에 가입시키기 위해 갔던 미국에서, 서서평은 갓 1살 된 자신을 할머니에게 버려두고 떠났던 어머니를 다시 만난다. 하지만 어머니는 “니 몰골이 내 딸이라 하기에 부끄러우니 썩 꺼지라”고 서서평을 내쳤다.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서서평은 수양딸 13명과 나환자의 아들 1명 등 14명의 한국 아이를 입양해 기른 ‘조선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냥 데려다 기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좋은 곳으로 시집가도록 돕고, 소박이라도 맞으면 자활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그의 역할이었다.

1933년에는 서서평은 조선인 목회자 등 동역자들과 함께 50여명의 나환자를 이끌고 서울로 행진을 시작했다. 강제 거세 등으로 나환자들의 씨를 말리는 정책을 펴고 있던 일제 총독부에 나환자들의 삶터를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소식을 들은 전국 각지의 나환자들이 이 행진에 합류했다. 서울의 총독부 앞에 이르렀을 때 동참한 나환자들의 숫자는 530여명에 달했다. 결국 총독부도 두 손을 다 들었다. 소록도 한센병환자 요양시설과 병원은 이렇게 시작됐다.

 

 

 

◇장례행렬 나환자들 “어머니” 부르며 오열
최초의 광주시민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를 땐 수천의 광주 시민과 나환자들이 쫓아 나와 “어머니”를 부르며 오열했다. 당시 한 일간지는 사설에서 “백만장자의 귀한 위치에서 하인을 두고 차를 몰고 다니는 선교사들, 동족의 비참한 생활에 눈감고 오직 개인 향락주의로 매진하는 신여성들이 양심에 자극을 받길 바란다”고 썼다.

 


그가 한국땅을 밟은 지 100년을 맞은 올해에야 기념사업회가 세워졌다. 양창삼 한양대 명예교수의 ‘조선을 섬긴 행복’, 양국주 씨의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이상 Serving the People 펴냄) 등 평전 2권이 세상에 나왔다. 재미교포인 양국주 씨는 미 재무부 등록 전쟁·재난 구호 NGO ‘열방을 섬기는 사람들(Serving the Nations)’ 대표로 활동 중이다.

 


그는 “서서평 선교사는 남자가 아닌 독신여성, 목사가 아닌 평신도, 의사가 아닌 간호사라는 이유로 잊혀 있었다. 유산 놓고 다투는 부잣집 자식들처럼 가진 게 너무 많아 근심뿐인 한국교회가 다시 돌아봐야 할 분”이라고 했다.

 


참석자들은 기념식 뒤 인근 호남신학대 캠퍼스 언덕 위의 선교사 묘역으로 갔다. 이끼 낀 서서평 선교사의 묘비에 화환이 놓였다. 설교를 맡은 서서평기념사업회 회장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 원로)의 목소리는 피를 토하듯 절실하게 느껴졌다.

 


“여수 애양원에서 나환자를 섬겼던 손양원 목사의 삶, 그리고 서서평 선교사의 삶.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게 원본입니다. 말기암 환자인 91세 박재훈 목사가 손양원 목사를, 뇌졸중으로 쓰러져 다리를 쩔뚝이는 양국주 대표가 서서평의 삶을 이 땅에 되살려냈습니다. 지금 기독교는 대응되는 실제가 없는 공허한 단어로만 말해지고 있습니다. 믿음은 논리가 아닙니다. 삶이며 생명 그 자체입니다. 믿음은 늘 구체적인 삶의 용솟음입니다. 손양원과 서서평이라는 믿음의 원본을 다시 갖게 된 것을 감사합시다. 한국교회는 이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출발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서서평 선교사의 무덤은 광주 양림동 호남신학대학교 뒷편 양림산에 자리한 선교사 묘역에 있다. 

 

 

 

 

서서평 선교사, 국민훈장 추서<追敍> 발견

 

196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동백장 추서 받아...50여 년 만에 확인.

이일학교(한일장신대, 총장 구춘서)와 조선간호부회(현 대한간호협회), 부인조력회(현 여전도회연합회) 조직 등을 한 독일인 선교사 서서평(본명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 Elisabeth Johanna Shepping) 선교사196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추서 받은 기록이 50여 년 만에 발견됐다.

 

 

 

이 기록에 따르면 서서평 선교사는 1969911일 국무회의를 거쳐 916일 수여받았다. 국민훈장 동백장은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인물에 수여되는 것으로 국민훈장에서는 3번째 등급에 해당하는 매우 높은 등급의 훈장이다. 특히 외국인이면서 서거한지 35년이 지난 1969년에 대통령과 국무총리 이름으로 추서된 것은 매우 특별하고 의미있는 일이다. <뉴스파워에서>

 

 

 

 

'강제 낙태·단종 한센인' 소록도에서 첫 특별재판<2016. 6. 20일>

 

 

-서울고법 민사30(재판장 강영수)가 한센인들의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 특별재판을 연 20, 전남 고흥군 국립소록도병원 별관 2층 소회의실은 한센인의 눈물과 바람을 담는 공간이 되었다. 사법부가 한센인 인권 침해 현장을 살피러 소록도를 찾는 것은 소록도병원 개원 10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원고 대리인, 자극적인 부분은 얼른 넘겨주세요.” 강영수 재판장이 한센인 쪽 변호를 맡고 있는 조영선 변호사에게 말했다. 조 변호사는 낙태수술로 한센인 산모의 몸에서 죽어 나온 태아들이 유리병 속에 담겨 병원 서랍장에 놓여 있던 사진을 법정에 공개했다. 병원은 숨진 한센인의 몸에서 적출한 장기 등도 연구용으로 보관했었다. 1996년까지 병원은 이렇게 숨진 태아들을 보관했다고 한다.

 

한센인 80여명이 방청석을 가득 메운 법정은 김복자(가명·74)씨의 증언이 이어지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병원에서 오라 해서 갔더니 옷을 할딱벗기고 임신했냐 그러더라고요. 보조의사가 마취도 안 했어요. 한 시간 반 정도 기계를 넣어갖고 하는 거 같은데 너무 고통스러워 며칠을 하혈했어요.” 한센인 환자 김씨는 23살이던 1967년 당시 소록도에서 지내다 원치 않은 낙태를 당했다고 증언했다. 김씨 등 138명은 정부가 한센인들에게 낙태·정관수술 등을 강요하는 인권침해를 했다며 소송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동의를 받고 한 수술이었기 때문에 위법성이 없다고 맞서고 있다. 피고인 정부 쪽이 요청한 김인권 여수애양병원 원장이 이어 증언대에 섰다. 김 병원장도 한때 소록도병원에서 근무했다. “소록도에서 아이 낳는 걸 금지한 건 사실이에요. 소록도병원 예산은 환자들을 위한 것이지 환자의 자녀를 위한 게 아니었어요. 저도 하는 수 없이 정관수술을 했지만 환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리안느·마가렛 수녀(소록도병원에서 한센인들을 돌본 수녀들)도 개인적으로는 낙태에 반대하셨지만 소록도 실정에선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지금의 기준으로 과거의 잘잘못을 가리는 건 적절치 않아요. 국가로선 당시 그건 최선이었어요.”

 

1시께 잠시 휴정이 되었다. 법정 밖으로 나온 한센인들의 불만이 터져나왔다. 21살이던 1959년 소록도에서 낙태를 당한 한 주민(78)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고 싶지 않다고 우리는 말도 못 했어요. 안 그러면 소록도를 나가야 했고 그러면 먹고살 수도 없었어요.” 그는 이날 임시 재판정으로 사용된 병원 별관 2층 자리가 원래는 병원 본관이라 불리던 곳이고, 낙태가 이뤄지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오후 2시께 강영수 재판장과 원고와 피고 쪽 변호인 등이 병원에서 걸어 3분여 거리인 검시실 건물 앞에 모였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빨간 벽돌 건물. 소록도 주민 이남철(67)씨가 판사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설명했다. “저희 한센인들은 세 번 죽어요. 숨이 끊어질 때 한 번, 해부당하면서 또 한 번, 화장당하면서 한 번. 이곳이 시체 해부실이었어요.” 해부는 유가족의 동의 없이 이루어졌다고 이씨는 설명했다. 해부실 옆은 감금실 건물이다. 감옥처럼 생긴 어두컴컴한 작은 방. 관광객을 위한 알림 표지판에는 일제 강점기 인권 탄압의 상징물이라고 설명이 달려 있었다. 이씨의 설명은 조금 달랐다. “섬에서 도망가는 사람들이 붙잡히면 여기 감금됐어요. 1980년대까지 썼던 건물이에요.” 강영수 재판장 등은 이어 한센인의 유골을 보관했던 만령당을 찾아 묵념을 했다.

 

한센인들은 현재 국가를 상대로 5건의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2014년 광주지법 순천지원 민사2(재판장 유영근)가 낙태·정관수술을 당한 한센인 9명에게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뒤 같은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이 중 한 건은 대법원에서 심리 중이고 나머지 네 건은 서울고법에서 심리 중이다. 정관·낙태수술의 강제성 여부, 국가가 어디까지 개입하고 혹은 방관했는지에 대한 입증 여부가 쟁점이 될 전망이다. 박승주 국립소록도병원생자치회장은 20<한겨레>와 만나 “(강제 정관수술 피해를 당한) 87살 소록도 주민이 그저께 한 분 또 돌아가셨다. 소송에 참여한 분들이 나이가 많기 때문에 어서 국가의 사과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겨레 신문>

 

 

 

-"강제성은 없었다. 불법행위를 했다고 지목된 당사자는 한센인을 평생 돌본 의료진들이다.” “국가가 피해를 준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이는 환자들을 위한 것이었다.”(2016. 620일 소록도에서 열린 한센인 손해배상 항소심에서 정부측 변호사와 의사의 발언) '사람이 아닌 문둥이들의 땅, 그 천형의 땅 소록도에서 지난 20'문둥이'들이 '사람'으로 발언하는 특별 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둥이'라는 존재에 대한 최소한의 기초 지식이 필요하다. 한하운의 시 향수는 이 땅에서 나병환자라는 처지가 어떤 존재였는를 절절히 보여준다 

 

이날 특별법정은 한센인들이 국가를 상대로' 한센인에 대한 강제 낙태와 정관절제 수술'에 대해 제기한 손해배상 항소심을 맡은 서울고법 민사30(부장판사 강영수)가 고흥 국립소록도병원으로 찾아온 자리다.

 

꽃다운 세댁시절 아이를 강제낙태해야했던 70대 한 여인의 증언에 따르면 마취도 않고 낙태 수술을 했으며 약도 처방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단종(남자의 생식능력을 없애는)당한 할아버지들의 증언도 이어졌다. 이 증언은 식민치하도 타국이나 타 민족의 악행을 고발하는 것도 아니다. 버젓이 독립국가, 눈부신, 엄청난 속도의 국가재건이 이뤄지던, 대명천지간에 벌어진 일이고 그걸 다투는 자리다. 놀라운 사실은 이 눈물의 땅, 한 많은 '문둥이'들의 땅에서 열린 다툼의 자리가 국가(정부)가 한센인에 대한 국가의 배상결정에 불복해 '항소'한 자리라는 점이다

 

한센인 단종·낙태 피해자 500여명은 '국가가 수술을 강제했다'2011년부터 1인당 5000만원을 배상하라는 5건의 국가 소송을 제기했고 그동안 법원은 단종 피해자에 3000만원, 낙태 피해자에 4000만원의 배상 판결을 내렸다. 이에 정부는 수술의 강제성을 부인하며 항소를 진행 중인 것이다. 국가의 항소는 끔직하다. 이 항소는 국가가 또 다른 수많은 '문둥이'들을 양산하겠다는, 하고 있다는 자기방어, 자기부정에 다름 아니다. <무등일보>

 

 

 

-한센인들이 집단 소송을 제기한 지 5년여 만인 20172월에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은 한센인 19명의 국가소송 상고심에서 국가의 상고를 기각하고 낙태 피해자 10명에 4,000만원, 단종 피해자 9명에 3,000만원의 배상금과 그 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국가 소속 의사 등이 한센인들에게 시행한 정관절제수술과 임신중절수술은 신체에 대한 직접적인 침해행위"라며 "그에 관한 동의 내지 승낙을 받지 않았다면 헌법상 신체를 훼손당하지 않을 권리와 태아의 생명권 등을 침해하는 행위이고 한센인들의 임신과 출산을 사실상 금지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인격권 및 자기결정권, 내밀한 사생활의 비밀 등을 침해하거나 제한하는 행위라고 판단했다. <라포르시안;2011년 보건의료 분야의 대안매체를 표방하며 창간>

 

 

 

수탄장

 

 

 

1950~1960년대 소록도병원에서는 섬을 직원지대와 병사지대<病舍地帶>로 나누고 2km 정도의 철조망을 쳐 경계로 삼았다.

 자녀와 부모들은 직원들의 통제하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만났으며 서로 만지거나 안아볼 수 없었다.

특히 전염을 우려해 자녀들은 바람을 등지고, 부모는 바람을 안고 서야 했다.

이러한 면회 장소를 원생들은 탄식의 장소라는 뜻으로 수탄장이라 불렀다.

 

 

 

-마리안느 간호사<수녀. 83살>는 2005년 국립소록도병원을 떠난 지 11년 만인 2016년 4월 26일 다시 찾음. <1916. 소록도 자혜의원 설립 100년이 되는 해>

-관련 단체에서는 2019년 1월 말까지 마리안느, 마가렛 두 간호사 노벨 평화상 후보 추천 추진

 

 

-2011년. 국립소록도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한센인들이 대지진으로 고통받는 일본인들을 위해 모은 돈<747만 5,000원>을 일본 후생 노동성에 보냄

-2019. 4월. 국립소록도병원 원생자치회에서는 산불로 피해를 입은 동해시 이재민에 마을주민 500명이 십시일반 모은 성금 200만원을 전달

 

 

*소록도를 마치면서 가장 기억에 잊히지 않을  

-옮겨도 죽고 옮기지 않아도 죽는다는 뜻의 '죽어도 놓고 바위'로 불리다. <소록도 1, 3에서>

1936년 하루는 십자봉<위의 지도 1번>에서 캐낸 큰 돌을 옮길 목도꾼 40명을 선발 운반해 오는 길. 위험한 작업이었지만 간호장 사토의 허락 없이는 쉴 수 없었다. 중앙공원 가까이 와 견디다 못한 목도꾼들은 누가 시키기라도 한 듯 "죽어도 놓고"라고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목도채를 놓았다.

 

-신생리<위의 지도 16번>에 사는 정수봉이 "주민들에게 벽돌 지러 갑시다. 아무개 정수봉 벽돌 졌다네"

왜 강점기 소록도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소가 어디냐 묻는다면 바로 이곳 벽돌 공장 터 자리다. 정수봉이 감시원의 눈을 피해 바다로 헤엄쳐 도망가버렸다. 그뒤 환자들은 도망자가 생길 때마다 "아무개 정수봉 벽돌 졌다네" <소록도 3에서>

 

*어린 시절 한센병, 나병, 문둥병 환자 이들에 대해 들은 것이 지금까지도 그대로 이어져 온 것 같다. 그 뒤로는 생각할 여유조차도 없었다. 이번 소록도 탐사를 통해 조금이나마 한센병의 실체를 알게 되고, 그들에 대한 편견 차별에서 벗어나 그들이 말하는 '네 번째 죽음'만은 일어나지 말아야겠다는 것이 얻음이라면 얻음이라고 해야 할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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