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고흥 <소록도 5>

아리1 2019. 4. 28. 01:42

2019. 3/24. 소록도 한센병환자 감금실, 검시실, 중앙공원

 

 

 

12시 7분. 박물관에서 나와 감금실, 검시실, 자료관, 중앙공원 <자료관은 다음에>

 

 

 

 출입 금지

 

 

 

서무과

 

 

 

서무과 뒤편

 

 

 

원생 자치회

 

 

 

 

 

 

 

 

 

 

 

 

 

 

 

 

 

 

 

 

 

 

 

 

감금실 

 

 

 

감금실은 1935년, <줄임> 왜놈 강점기 인권탄압의 상징물이다. 붉은 벽돌과 육중한 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남과 북 두 건물이 회랑으로 연결된 'ㅐ'자<애의 ㅐ임. 여기는 영어 H로 나와 있으나> 형태로 방은 철창이 설치되어 있고 각 실의 마루 한쪽을 들어 올리고 용변을 볼 수 있는, 형무소와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다. <줄임> 일제 말기에는 부당한 처우와 박해에 항거하던 환자들이 무수히 이곳에서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었으며, 출감 때에는  어김 없이 정관절제를 당하였다. <줄임>

 

 

 

 

 

 

이 어마어마한 말뚝은 차량 돌진 방지용인 듯

 

 

 

감금실

감금실 안쪽에 들어와서 본 모습. 감금실 방은 모두 열두 개로 겨울엔 그 가운데 하나의 방에 한 자<30cm> 정도의 깊이로 물<물방>을 채운 다음, 왜놈들 눈밖에 벗어난 환자의 바지를 걷어 올리게 한 다음 물방에 감금했다가 죽으면 해부실로 옮겼다 함.

 

 

 

 

 

 

 

 

 

 

 

 

 

 

 

 

 

 

감금실 안에 변기가 같이 있음.

 

 

 

박물관에서도 아래와 같은 구조로 만들어 놓았는데 그때 이곳 문도 새로이 손을 본 듯

 

 

 

 

 

 

 

 

 

감금실 <김정균>

 

 

감금실

                                                                                                    김정균

 

아무 죄가 없어도 불문 곡직하고 가두어 놓고

왜 말까지 못하게 하고 어째서 밥도 안 주느냐

억울한 호소는 들을 자가 없으니

무릎을 꿇고 주께 호소하기를

주의 말씀에 따라 내가 참아야 될 줄 아옵니다.

 

내가 불신자였다면 이 생명 가치 없을 바에는

분노를 기어코 폭발시킬 것이오나

주로 인해 내가 참아야 될 줄 아옵니다.

 

이 속에서 신경통으로 무지한 고통을 당할 때

하도 괴로워서 이불껍질을 뜯어

목매달아 죽으려 했지만

내 주의 위로하시는 은혜로

참고 살아온 것을 주께 감사하나이다.

 

저희들은 반성문을 쓰라고 날마다 요구 받았어도

양심을 속이는 반성문을 쓸 수가 없었노라. 

 

 

*마지막 부분 "저희는 반성문을 쓰라고 날마다 요구받았어도 양심을 속이는 반성문을 쓸 수가 없었노라." 감금실에 갇혀 모진 고통을 겪으면서도 이렇게 '양심을 속이는 반성문은 쓸 수가 없다.' 그놈의 하잘것없는(?) 양심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길래 어느 한순간 목숨과도 바꿀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이름 모를 이름 없는 들풀보다 못한 존재들<아래의 단종대를 쓴 이동. 이들 훗날이 정말로 궁금하다>친일인명사전에 당당하게 오른 너무나 잘 아는 이름들 너무나 있는 바로 그 이름들 최남선 이광수 김성수 박정희 방응모 홍난파 등 호의호식하며 민족을 팔아 처먹은 매국노들이 이 글을 보았다면. 접싯물에 코를 담그고 빠져 죽어도 시원찮을 것이다.

 

 

 

단종대 <이 동>

 

 

단종대

                                                                            이 동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

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

 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도 통곡한다.

 

 

 

왜놈 강점기 한센병 환자 징계 검속권

 

 

 

검시실 <두 번째 죽음>. 1935년. 해부[생체실험], 단종, 낙태.

 

 

 

검시실 또는 해부실로 불리는 이 건물은 두 칸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초입의 넓은 방은 사망환자의 검시를 위한 해부실로 사용되었고 안쪽은 주로 검시에 앞서 사망환자 시신을 모시는 영안실로 사용되었다. <줄임>. 이러한 상황을 보고 소록도의 환자들에게 "3번 죽는다"라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 첫 번째는 한센병 발병, 두 번째는 죽은 뒤 시신 해부, 세 번째는 장례식 뒤 화장이다. <윗글에서>

 

 

 

검시실 앞쪽

 

 

 

검시실 뒤쪽

 

 

 

이곳은 소록도에서 한 많은 삶을 사신 분들의 육신이 마지막 머물다간 존엄한 공간입니다. 고인의 넋을 기리는 마음으로 엄숙하게 관람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검시[해부] 기구들인 듯

 

 

 

 

 

 

 

 

 

해부대

*해부대. 주검을 해부하면 피가 좀 더 깊게 팬 골을 따라 가운데로 흘러 거기서 다시 관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 위에서 보듯 밑바닥에 있는 구멍으로 나오면 수돗물로 씻어내는 그런 구조인 것 같음. 그때를 생각하면 이 검시실 주변이 온통 피비린내로 진동하지 않았나 한다. 1941년 무렵에는 매일 5-6회의 해부가 이루어졌다 함. 아래 장면에 나오는 들것은 주검을 나르는 기구로 보인다. 

 

 

 

 

 

 

 

 

 

영안실. 위의 검시실 얘기대로라면 이곳은 검시에 앞서 사망환자 시신을 모시는 영안실이어야 하는데 단종 수술대 조각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같이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왼쪽으로 살짝 보이는 방이 바로 위에서 보았던 해부실. 그런데 이곳 영안실은 사방이 벽 쪽으로 둘러가며 골이 나 있어 피를 쉽게 씻어내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선반 다리가 나무여서 피 냄새가 더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 같다. 특이하다면 선반 다리 길이가 같지 않다는 것. 골로 파인 곳의 다리가 패인 만큼 더 길지만, 전체로는 평형을 이루고 있다. 이는 주검을 올려놓았을 때 다른 지지대 없이도 앞으로 엎어지는 것을 막으려는데 있는 것 같다. 어쨌거나 그때 그 빈 선반 위에는 두 번의 죽음, 해부 정확히 부관참시 아니 그보다 더한 주검 유린을 당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쇠로 된 기구는 또 무엇이고 씻는 곳은 기울기를 달리해 놓았음.  

 

 

 

여기에 나오는 단종대도 부관참시 되어 조각조각 떨어져 나간 건가.

 

 

 

 

 

 

 

 

 

두 번째 죽음 방을 나와서 이제 갈 곳은 마지막 죽음 화장장. 부모 형제 친척도 모른 체 어디론가 사라져 간다.

 

 

 

단종 수술대

<다음 어느 자료에서>

 

 

 

중앙공원 

 

감금실 검시실 지나면 마지막으로 나오는 곳. 말이 공원이지 한센병 환자들의 피와 땀으로 저려 있는 '고통의 장소'라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1936121일 착공, 34개월 동안의 공사 기간을 거쳐 194041일 완공하고, '부드러운 동산’(?)이라 불렀다. 당시 산림을 깎아 만든 공원의 면적은 약 19,800에 달했다. 소록도에 수용된 한센병 환자 연인원 6만여 명을 강제동원하여 조성하였으며, 득량만과 완도 및 소록도 주변 섬에서 바위를 채석하여 옮겨왔다. '소록도 1'의 영상물에 나와 있는 <"옮겨도 죽고 옮기지 않아도 죽는다는 뜻의 '죽어도 놓고 바위'로 불리다">는 말이 이를 두고 나온 것 같다.

 

광복 뒤 공원 이름이 소록도 중앙공원으로 변경되었고, 1971년과 1972년 공원 확장이 이루어져 지금 넓이는 약 25,000에 이른다. <다음에서>

 

구라탑<구라. 救癩. 나균에서 구하다>은 오마도<五馬島. 해안을 낀 다섯 개의 섬 즉, 고발도, 분매도, 오마도, 오동도, 벼루섬을 연결한 모양이 말()의 형태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간척사업에 참여한 국제 워크캠프단이 1963년에 세운 기념탑이다. 미카엘 대천사가 나균을 박멸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한다. <다음에서>. 탑 아래엔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글이 쓰여 있다. 제4대 원장 스호가 제 몸뚱아리 동상을 세운 바로 그곳에 구라탑을 세움. 

 

*한센인의 노동으로 이룩된 오마도 간척지<약 330만 평>를 한센인에게 돈을 받지 않고 나누어 준다던 그 약속은 어디로 가고 교활한 정권의 세 치 혀에 고통만 안겨준 이 간척 사업은 왜놈들보다 못한 악질 행위다. <소록도 2.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일만 열심히 하고 있는 환자들>

 

왜 강점기 소록도 병원장 가운데 가장 악랄했던 놈이 4'스호 마사토'. 그놈은 1933년 부임해 1942년 피살되기까지 9년간 재임하면서 자신의 동상을 세워 원생들에게 참배를 강요했다. 이에 한센인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마침내 원생 이춘상은 '스호' 이 개돼지 새끼보다 못한 이놈을 쳐 죽이고 자신도 처형<1943년 2월 19일. 대구 형무소에서 교수형>되었다. 나중에 이놈의 동상은 1943년 태평양 전쟁 물자로 철거되고 그 자리에 지금의 구라탑이 세워졌다. <아래 수오 동상 글에서>

 

*뿌린 대로 거두리라!

 

 

 

구라탑

 

 

 

나병 업병 문둥병

 

우리나라에서는 한센병을 나병(癩病), 업병(業病) 혹은 문둥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두꺼비의 의미도 담고 있는, 한센병 환자의 피부가 흡사 두꺼비 모양과 비슷하다는 데서 유래한다 

 

현대 의학에서 한센병은 중병이라고 이름 짓기 미안할 정도로 정복된 지 오래다. 명백한 보기로 한센병에 걸려도 항생제의 일종인 리팜핀’ 600mg을 단 한 번만 복용하면 체내 나균의 99.99%가 전염력을 상실한다. 또한 성 접촉이나 임신을 통해서도 감염되지 않으며 유전도 되지 않는다. 한센병 환자와 24시간 같이 생활하는 경우에도 전염 위험은 240만 명 중의 1꼴이니 통계 자체가 신뢰도를 확보하지 못할 수준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한 해 20여 명 정도의 환자가 발견되는 정도이며, 의무접종 중의 하나인 결핵 예방 BCG 접종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라면 이런 발병 확률조차도 의미가 없어진다고 본다. 설사 발병되더라도 복용 약만으로 대개는 6개월, 최장 2년 이내 완치가 되며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또한 한센병 완치환자의 경우 감염위험은 완전 소멸한 상태로 일상생활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해외 선교 단체에서 파견된 자원봉사자들이 소록도로 들어온다. 이 중에서 소록도 할매라고 불렸던 오스트리아 출신 간호사인 마리안느 스퇴거(1934년생)와 마가렛 피사렛(1935년생)의 봉사 활동은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가장 커다란 일을 했다. 이들은 수녀가 아닌 무보수 일반 자원봉사자 신분으로 40년을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들과 어울렸다. 특히 맨손과 맨입으로 환자들의 피고름을 짜내고 한센병 환자들과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며 존댓말을 쓰는 등 당시 격리된 채 생활하던 한센병 환자들의 인권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더구나 오스트리아에서도 부유한 의사 아버지를 둔 마가렛의 헌신으로 풍부한 약품 지원을 받았으며 마리안느를 후원하던 오스트리아 부인회의 돈 지원까지 더하여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의 생활 환경은 말로 이루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하여 지금에 이르렀다[다음, 서울신문에서. 왜놈식 표현은 일부 고쳤음]

 

 

 

이춘상 의거

 

의거일. 1942년 6월 20일 08시 5분. 그때 나이 27살.

 

제4대 원장 스호는 한센병 요양시설을 만들면서 아래 알림판에도 나와 있지만 환자들을 노예처럼 부렸다. 또한 전시 군수 물자 조달을 위해서 환자들에게 혹독한 노동을 강요했고, 당시 실상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지금 소록도에는 성한 소나무를 찾아보기 힘들다. 일제시대 소나무에서 추출된 송진은 송탄유라는 이름으로 항공기에 사용됐다.

 

이춘상은 14세 때 한센병이 발병하여 대구<고향은 경북 성주>에서 2년 동안 치료를 받고 퇴원했다. 그 후 만주로 건너가 마적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1930년대 근 현대사에서 중국에서 마적단 활동으로 신분을 숨기고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 만주에서 돌아온 이춘상은 소록도로 수용되었고<몸 상태가 오죽 했으면 천형의 섬 소록도로 갔겠느냐만> 당시 한센인들을 향한 온갖 만행을 지켜보며 스호 마사키를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또한, 이춘상이 단순 마적단 이었다면 독립운동가 김창숙<성균관대 설립자이자 초대 총장> 선생에게 독립 자금을 제공하고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주러 두 번이나 갔었던 사실은 그가 단순한 마적단이 아니었다는 점을 강하게 시사한다. 가장 확실한 것은 당시 이춘상의 아버지 이수봉 선생은 독립운동가였다. 이것은 분명한 자료로 기록되어있다. 

 

이춘상은 법정에서 "수호 원장을 죽인 것은 개인의 감정에서가 아니라 의분에 의한 것이다. 원장이 총애하는 사또(佐藤) 간호장이 원장의 앞잡이가 되어 확장공사 등 각종 사업에 동료 원생들을 혹독하게 사역시켰기 때문에 원장을 살해하여 여론화되면 이 기회에 소록도의 비참한 생활을 적나라하게 폭로 공개하여 시정을 바라던 것이다"라고 태연하고 당당하게 살해 동기를 진술하였다.

 

그러나 재판 과정은 놀라웠다. 판사가 이춘상에게 왜 마사토를 죽였냐고 묻자 이춘상은 원장의 학정에 관한 죄상기록을 낱낱이 밝혔다. 일본 판사가 증인인 동료환자에게 사실여부를 물었다. 병원 직원들의 눈치를 보던 환자는 <아니다> 라고 부인해버린다. 그가 제대로만 증언했어도 사형은 면할 일이었다. 판사는 사람이 걸어가다 벌레에 물려 죽었으면 벌레도 죽여야 한다는 논리로 사형 선고를 했다. 소록도 감금실에 갇혀 있던 이춘상은 대구로 옮겨 간 뒤 그곳에서 결국 교수형을 당했다.

 

2003년. 이춘상 선생기념사업회에서는 국가보훈처에 이춘상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해달라는 신청을 했다. 그러나 당시 보훈처는 이춘상의 행위가 '독립운동 성격이 모자란다'는 까닭으로 신청을 기각했다. 

 

"사건이 발생한 뒤 왜의 한 신문은 '조선 제1 흉악범은 이등 공<이토 히로부미>을 살해한 안중근이고, 제2의 흉악범은 이춘상'이라고 소개했다고 합니다. 왜도 이춘상 선생의 의거를 민족운동 차원에서 봤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당국은 계속 근거 자료가 부족하다고만 하니 답답한 노릇이지요."

 

2005년. 한센인 인권단체인 한빛복지회와 서울대 사회학과 정근식 교수, 한센병소록도보상청구소송 박영립 한국변호인단장은 지난 9월 이씨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을 정식으로 접수했다. <다음에서>

 

나도 같은 생각으로 자료를 찾아보았는데 역시 이런 움직임이 있었다. 국가보훈처에 말한다. 강점기 한센병 발병, 해부<생체실험>, 장례식 뒤 화장 3번의 죽음도 모자라 또다시 벙어리 3년, 장님 3년, 귀머거리 3년 이따위 식으로 할 건가. 가장 악랄했던 스오의 처단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이런 사람을 독립유공자로 하지 않으면 누구를 유공자로 할 건가. 16년, 14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다는 건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강점기 나라 밖에서는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등 여러 의사들이 왜의 악질 고위층 놈들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등 그러한 의거는 잘 알고 있으나 나라 안에서 그것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이춘상 의사가 처음이 아닌가 한다. 더구나 섬이라 도망가지도 도망갈 수도 없는 곳 아닌가. 그리고 동상 하나 없는 것 또한 그렇다. 단지 한센병을 앓았던 환자라서?  

 

<이춘상 의사 의거는 동상 하나 없이 위의 구라탑 뒤 조그마한 흰 동그라미 안 알리미 하나가 모두이다.>

 

 

1.중앙공원 개원 제 40주년 기념비 <참으로 기념할 만한 비네요. 한센인의 고혈을 짜서 만든 공원인지 뭔지가. 어디 이것뿐이겠느냐만. 1940년 4월 완공했으니 이는 1980년을 말하는 듯>

2.순 악질 스오 동상 흔적<처음 자리는 지금의 구라탑이 있는 곳>

3.시인 한하운 '보리피리' 시비  

 

 

 

 

이춘상 의사가 부엌 칼로 찔려 죽인 개돼지 새끼보다 못한 순 악질 스오. 이런 개돼지 새끼보다 못한 개돼지 새끼도 죽었으니 검시실에서 해부 생체실험을 하고 불태웠어야 하는 것 아닌가. 동상 자체도 무엇이 있다고 한센인들 고혈을 짜내서 나중엔 그마저도 그들 전쟁물자로 뜯어갔으니. 개돼지 새끼보다 못한 순 악질 스오 개돼지 새끼. 동상 자체 높이도 스오 이 개망나니보다 30 아니 300배나 더 큰 3.3미터에 전체 높이 9.6미터. 이런 망할 개돼지 새끼보다 천배 만배나 더 순 악질 개돼지 새끼. <여기 이글을 읽은 수 있는 나이는 백살부터임(?). 얼마 앞서 어떤 자가 한 개돼지 소리에 더욱 힘을 얻어서(?). 나는 왜놈에게 하는 소리니> 이 의거 뒤 소록도 부엌 식칼 앞부분을 모두 부러뜨리게 했다 함. 남의 목숨은 헌신짝처럼 여기던 왜가 왜소한 것들 모가지는 그렇게도 소중한 것인지.

 

 

 

시인 한하운 '보리피리' 시비. 아래는 보리피리를 비롯한 한하운 몇몇 시

 

 

한센병 환자였던 한하운의 <보리피리>가 새겨진 바윗돌은 원생들이 완도<바로 아래 위에 있는 고흥이나 거금도도 아닌 완도에서>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원생 40여 명이 밧줄로 꽁꽁 묶는 데 한 달 남짓, 드럼통 115개로 뗏목을 만들어 싣는 데 6개월 남짓 걸리는 등 계획에서 비를 세우기까지 28개월이나 걸렸다 함.

그래서 나온 말이 "겨도 죽고 옮기지 않아도 죽는다는 뜻의 '죽어도 놓고 바위'로 불리다."

물론 이 바위는 강점기에 일어난 일이고 한하운 시비는 1973년에 세워짐.

 

 

 

보리피리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ㄹ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ㄹ닐리리.

 

 

*인환(); 사람이 사는 세상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인간의 세계'로 나오나 '인간'은 왜놈식 한자어.

이 사전이라 해서 만사형통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둡니다.>  

 

 

 

전라도 길

                                          -소록도로 가는 길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罰>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아무 법문<法文>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

 

옛날부터

사람이 지은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벌을 받게 했다.

 

그러나 나를

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 내세워놓고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파랑새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가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이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향수

내 고향 함흥은
수수밭 익는 마을
누나가 시집갈 때
가마타고 그 길로 갔다
내 고향 함흥은
능금이 빨간 마을
누나가 수줍어할 때
수수밭은 익어갔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을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호적도 없이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올시다.

 

 

 

흔히 한하운 하면 한용운과 비교해서 둘 다 시인이나 한용운은 스님이자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하나, 한하운은 문둥병 환자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데요.

한하운(韓何雲, 1919.2.24-1975.2.28). 본명 태영(泰永). 1919224일<다른 곳에서는 1920년 3월 20일> 함경남도 함주군 동천면 쌍봉리 선비였던 한종규의 2남 3녀 가운데 맏아들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본 유학<나병 귀국>. 중국 베이징[北京]대학 농학원<나병 재발>을 졸업한 뒤 함남 ·경기 도청 등에 근무하다가 나병의 재발로 사직하고 고향에서 치료하다가 1948년에 월남1 시집 (한하운 시초<詩抄>. 1949년)를 간행하여 나병 시인으로서 화제를 낳았다. 이어 제2 시집 (보리피리. 1955년)를 간행하고한하운시전집(1956년)을 출간하였다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 1958년)자작시 해설집 (황토<黃土>길. 1960년)을 냈다. 자신의 천형(天刑)의 병고를 구슬프게 읊은 그의 시는 애조 띤 가락으로 하여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그는 일생 끊임없이 나병 환자를 위한 투쟁을 진행하였으며, 정부에 의해 나병환자 중심으로 진행되던 소록도 간척사업이 중단되었을 때는 정부를 비판하기도 하는 등 활동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1936 ~ 경성대부속병원 나병 확정 진단<16 또는 17살>

왜, 돌중 유학 <두 곳 다 나병 재발>

1944 ~ 함경남도 도청 축산과 근무

1954 ~ 대한한센총연맹 위원장

1958.3 ~ 청운보육원 설립, 원장

1959 ~ 나병 음성 진단, 한미제역회사 설립, 회장 취임

1960.7 ~ 서울 명동에 출판사 무화문화사 설립

1973 ~ 전남 고흥군 도양면 소록도에 시비 건립

1975년 2월 28일 간장염으로 눈을 감음

 

주요 시로는 

생명의 노래/한강수/보리피리/ 리라꽃 던지고/ 여인/ 자화상/명동거리 1.2.3./전라도 길/추석달/ 고향/추억1.2/ 추우일기/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다음에서>

 

 

 

소록도 벽돌공장 이야기

 

"왜 강점기 소록도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소가 어디냐 묻는다면 바로 이곳 벽돌 공장터 자리다."

 

 

 

지금 십자고상이 서 있는 자리는 벽돌공장의 굴뚝자리입니다. 굴뚝자리에 십자고상이 있는 까닭은 환우분들이 버림받고 저주받아서 그런 고통을 당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해 주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도 저주받은 자로 돌아가셨고 지금은 그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가 구원의 상징이 되었듯이 말입니다. <윗글에서>

 

 

 

한센인 치료 및 주거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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