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안중근 의사 순국일

아리1 2019. 6. 18. 21:04

2019. 03. 26일

 

 

안중근 의사 순국일           <1910년 3월 26일>

이등방문 저격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사형 선고일    <2019년 2월 14일>

 

 

 

 

안중근

 

  

  

가슴에 달린 하얀 매듭에는 "安應七"이라 적혀있음.

ⓒ Πrate / wikipedia | Public Domain

 

 

 

 

18799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910326일에 순국했다.

대한제국 말기에 활약한 계몽 운동가, 의병 지도자, 독립운동가, 평화주의자.

 

유관순, 김구와 더불어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독립운동가 가운데 한명이다.

 

처음에는 교육 산업 등 민족의 계몽 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일제의 침탈이 사실상 국권을 뒤흔드는 수준으로 확대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후 그곳에서 의군을 조직하였다. 곧이어 독립군의 참모 중장으로서 활발히 활동했으며,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의거(義擧)를 하였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아명은 안응칠(安應七)이고 아명인 동시에 이 사람<*안중근>의 자()이기도 하다. 가톨릭 세례명은 토마스(Thomas). 이것에서 '도마 안중근'이라는 호칭이 나왔다. 과거에는 한국 가톨릭에서 사도 토마스를 도마로 국역했기 때문이다. 또는 한자로 多默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본관은 순흥(順興), 고려 시대 후기의 유학자 안향의 26대손이다.

 

 

 

가계

 

할아버지: 안인수(安仁壽), 진해 현감 역임

아버지: 안태훈(安泰勳), 성균진사

어머니: 조마리아(趙性女 마리아. 1862~1927) 독립운동가, 20088월 조마리아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 수여.

부인:   김아려(金亞麗)

여동생: 안성녀 누시아(1881~1954), 독립운동가, 부산 천주교 묘지에 안장.

남동생: 안정근(安定根), 독립운동가, 1949년 상하이에서 사망.

남동생: 안공근(安恭根), 독립운동가, 1939년 사망 추정.

장남:  안문생(安文生, 일명 안분도), 의거 뒤 연해주로 피신. 7살 때 누군가가 준 과자를 먹고 독살당함.

장녀:  안현생(1902 - 1959), 19534~ 19563월 효성여자대학교 (현 대구가톨릭대학교) 불문학 교수로 재직함.

       그녀의 남편은 한교민단(韓僑民團) 단장으로서 활동했었다고 한다.

       안중근 순국 100주기가 되는 2010년 3월 26일,  그녀가 쓴 수기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차남안준생(安俊生, 1907~ 195111), 폐결핵으로 사망. 혜화동 천주교원묘지에 안장. <변절>

손자:  안웅호(雄浩), 의학박사, 안중근의 유일한 손자.

손녀안연호(1938~ 201126)

손녀안선호( ~ 2003)

사촌형: 안봉근(安奉根). 최종고, 韓獨交涉史홍성사 (1983) 201, “어쨌든 이 안씨 집안에서는 독일인 신부의 주선으로 이미 1910년대에 독일을 내왕하고 있었다.”

4안명근(安明根. 1879~ 1927) 독립운동가

4촌 동생: 안홍근. 건국훈장

종질: 안춘생(安椿生, 1912812~ 2011126), 독립운동가, 한국 광복군, 대한민국 육군 중장, 초대 육사 교장, 국회의원 역임

   

 

 

동학 농민군 진압 활동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집 안에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겨 명사수로 정평이 났다. 아버지 안태훈은 산채에 개인적으로 사병들을 양성하고 있었는데,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 각지에서 동학도들과 농민들이 봉기를 하자 안태훈은 자발적으로 창의를 하고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여 승리를 거뒀다. 그 뒤 황해도 관찰사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산포군(山砲軍)을 조직해 농민군 진압작전을 펼치자 소년 안중근 역시 동학군 토벌에 참가하여, '박석골전투' 등에서 기습전을 감행하는 데 참여했다.

 

김구가 동학군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안태훈이 김구를 보호한 적이 있으며 그 시기에 안중근도 그와 안면이 있었으나 그리 친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구<1876829북한 해주시에서 태어남, 본관 안동. 안중근과는 세살 차이. 나중에 사돈지간이 됨. 동생 안정근 딸과 김구 장남이 혼인> 

 

 

 

천주교 입교

 

안중근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 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신앙심이 독실하였고, 안중근 자신도 1895년 천주교 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배웠다.

 

1897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프랑스 출신의 천주교 신부였던 조제프 빌렐렘(Joseph Wilhelem, 한국명 홍석구(洪錫九))으로부터 토마스(도마, 다묵<多默>)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안중근이 홍석구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안중근은 홍석구 신부와 함께 뮈텔주교와 만나 이야기를 한 후에 프랑스어 배우기를 그만두었다.

 

안중근(조정래 지음, 문학동네)에 의하면, 뮈텔 주교(한국이름 민주교)가 조선사람들이 학문을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학문을 하면 머리가 깨일 것이고, 머리가 깨이면 천주교 교리와 신앙에 대해 나름대로의 논리와 비판으로써 의문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를 보면서 실망한 안중근은 프랑스어 배우기를 그만두었다.

 

그 뒤 잠시 교회의 총대(總代; *전체를 대표하는 사람)를 맡았고 뒤에 만인계(萬人契1,000명 이상의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 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이 되었다.

 

 

 

독립운동 투신

 

1905<26>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이를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국권회복운동을 하기 위해 상하이[上海]로 갔으나 기대를 걸었던 상하이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절당하고 이무렵 아버지가 죽어 다시 돌아왔다.

 

1906<27> 3월에 이사한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경영하던 석탄상회를 정리하고 삼흥학교(三興學校. 뒷날 오학교<五學校>로 개명)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곧이어 천주교 계열인 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했다.

 

1907<28> 전국에 걸쳐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활동했다.

 

고종의 강제퇴위와 한일신협약의 체결. 군대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독립전쟁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일본군과 싸우다가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의 임시사찰(臨時査察)이 되었다. 이곳에서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의병부대의 창설을 협의하는 한편, 엄인섭(嚴仁燮김기룡(金起龍) 등과 함께 의병부대 창설의 준비단체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최재형(崔在亨)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최재형, 연해주에 있었던 조선 갑부이자 독립운동가. 군비 산업으로 막대한 돈을 벌었던 인물로 이때 벌어들인 부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했다

 

이들은 연해주의 한인촌을 돌아다니며 독립전쟁과 교육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의병을 모았다. 의병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이범윤을 총독, 김두성(金斗星)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참모중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두만강 부근의 노브키에프스크를 근거지로 훈련을 하면서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했다. <*진공; 적을 치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감.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1908<29>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으로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했다. 그 뒤 본격적인 국내 진공 작전을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과 신아산 부근에서 전투를 벌여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뒤>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때 기습공격을 받은 이유<*까닭>는 다른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해서 석방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부대는 해체되었다. 풀어준 일본군 포로들이 이들의 경흥 작전을 누설한 것이다.

 

<*포로들이 돌아가 안중근의 경흥 작전을 알려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아무리 국제공법에 따랐다 하더라도 이 전투가 끝난 뒤에 풀어줬어도 늦지 않았거니와 싸워보지도 못하고 미리 주둔하고 있는 곳까지 알려져 깊은 밤에 왜의 기습으로 대패했으니 군법에 따라 총살당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다. 이에 따라 신뢰를 잃은 안중근이 할 수 있는 일은 이토히로부미 저격과 같은 개별 활동뿐이 아니겠나 한다.>

 

 

 

이토히로부미 저격

 

1909<29. 융희 3> 32일 안중근은 노브키에프스크에서 함께 의병활동을 하던 김기룡·황병길·강기순·유치현·박봉석·백낙규·강두찬·김백춘·김춘화·정원식 등 뜻이 같은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 단지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안중근은 이때 왼쪽 손의 약손가락(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결의를 다졌다.

안중근의 수인(手印)은 이때부터 찍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로 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한다고 맹세했다.

 

그해 9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원동보 遠東報>와 대동공보<大東共報>를 통해 이토가 북만주 시찰을 명목으로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와 회견하기 위하여 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아래 독립투사 유동하일가의 유랑 80 참조>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플랫캡을 쓰고 폴로코트로 추정되는 코트를 말쑥하게 차려입은 모습.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서 이 차림으로 의거를 했다. <나무위키에서>

   

 

190910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건<*거사>은 그의 전 생애를 잘 설명<*말>해주는 대목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다만 안중근 본인은 이 일을 의거가 아닌, 김두성의 명령을 받고 대한의군 참모 중장의 신분으로 적국의 장수를 처단한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안중근은 대한의군 소속으로 활동했다.

 

*여기에는 안중근이 하얼빈 의거와 관련하여 자신의 배후로 지목한 대한 의군 총대장 김두성(金斗星)이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데, 이태진 서울대 인문학 교수는 김두성을 고종 황제 자신으로 지목했지만 신운용은 이를 반박하고 김두성은 가공의 인물이라고 주장했다.(출처: 신운용 한국의 안중근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 《남북문화예술연구11, 2012). 이보다 한참 앞인 1969년에 조동걸 춘천 교육대 교수(현 국민대 명예 교수)안중근 의사 재판 기록상의 인물 김두성고(춘천교대 논문집7, 1969)에서 김두성은 유인석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안중근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이 김두성이라는 인물은 그야말로 당시 항일 운동계에서 최고 수준의 거물이다. 이 정도 거물이면 아무리 본인이 철저하게 은둔했다고 해도 드러나는 행적이 있기 마련인데, 행적이 없다. 학계에서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안중근 의사가 자신의 상관이자 대한의군 총독이라고 주장한 이 인물의 정체를 밝히려고 애쓰고 있지만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항일 운동사 최대의 미스터리 중 하나. 유인석설, 고종설, 최재형설, 가상의 인물설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그런데 그 당시 독립 운동가들은 가명이나 위조 신분을 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의외로 이미 알려진 독립 운동가가 김두성이라는 가명을 쓴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 최재형은 연해주에 있었던 조선 갑부이자 독립운동가. 군비 산업으로 막대한 떼돈을 벌었던 인물로 이때 벌어들인 부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했다.

 

*가령 김구는 백정선이란 가명으로 생활했고 이 때문에 이봉창 의사는 죽을 때까지 김구의 본명을 알지 못했다. 김익상, 오성륜과 함께 황포탄 의거를 했던 독립 운동가 이종암 또한 양건호라는 가명을 쓴 바 있고 독립 운동가 김산 또한 '김산'이란 이름이 가명이며 본명은 장지락이다.>

 

한편, 안중근과 거사를 함께한 유동하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거사일 당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몰랐다고 한다. 알고 있는 것은 대략적인 얼굴상과 특징뿐이었는데, 사진을 구하기 쉬운 때도 아니었거니와, 이토 히로부미가 원태우의 돌팔매에 중상을 입고 죽을 뻔한 일을 겪은 뒤로 자신의 사진이 시중에 나도는 것을 극히 제한했기 때문이다.

 

*원태우, 구한말의 애국 지사.(188234~ 1950722일 총 24977)

조선 후기의 과천군 하서면의 농촌에서 출생했다. 농민 신분이라 학식은 높지 못했지만, 애국심과 의기는 무척 투철했다고 한다. 을사조약에 분노한 그는 최초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로 결심했으며 이토 히로부미에게 짱돌(!)을 던저 중상을 입히는 것으로 항거를 했다. 그때가 23살이었다. 이 의거는 일본 신문에도 신속히 보도되는 등 열도를 흔들어 놓았고, 원태우 지사는 일본 군경에게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당했다. 그때 고문의 후유증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태가 되었으며, 여름에도 긴팔과 긴바지를 입어야 할 정도로 흉터가 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독립이 될 때까지 일제의 집중 감시를 받아야만 했다.

 

거사일 하얼빈과 채가구(蔡家溝)를 거사 장소로 설정하고, 채가구에 우덕순과 조도선을 배치하고 그는 하얼빈을 담당했다. 하지만 채가구(차이쟈거우) 역의 지하 숙소에 매복하던 우덕순과 유동하는 기차가 멈춘 4분 동안 문이 잠기는 바람에 거사를 일으키지 못했고, 기차는 그대로 하얼빈 역에 정차했다.

 

오전 09,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한 뒤 9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이토가 하얼빈 역에 내렸을 땐 워낙 많은 수행원들이 함께하여 도저히 누가 이토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체념하던 순간에, 이토의 하얼빈 방문을 환영하는 현지 일본인 환영객들 가운데 누군가가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이토가 뒤를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준 덕분에 안중근이 이토의 얼굴을 확인하고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FN M1900, 할로 포인트 탄환으로 3발 저격했고 그 주위의 일본 측 인물도 4발 저격했다. 1탄은 이토의 오른팔 윗부분을 관통하고 흉부에, 2탄은 이토의 오른쪽 팔꿈치를 관통해 흉복부에, 3탄은 윗배 중앙 우측으로 들어가 좌측 복근에 박혔다. 3발 모두 급소를 맞췄다고 한다.

 

*FN M1900은 당대 최신형이라고도 부를 수 있으며 소형이어서 여러 정 준비할 수 있었다. 벨기에의 헤르스탈 조병창에서 제작한 FN M1900.32ACP탄을 사용하는 자동 권총이다. 기존의 자동 권총들은 대부분이 탄막 형성의 기능에 맞춰져 있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정확한 조준 및 살상력 확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FN M1900은 세계 최초로 슬라이드를 권총에 장착함으로서 기존과는 달리 화기의 크기가 매우 작아졌으며 동시에 사격 안정성 및 정확성을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남은 총알로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 俊彦)의 팔꿈치에 1, 이토의 수행비서 모리 다이지로(森 泰二郞)의 복부에 1,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田中 淸太郞)의 왼쪽 무릎에 1, 만주 철도 이사 나카무라 요시히코(中村 是公)의 오른쪽 장딴지에 1발을 맞췄다. 그리고 총알 한 발을 남기고 체포된다.

 

원래대로라면 러시아에서 수완을 쌓은 독립 운동가 최재형의 지원을 받아 제삼국인 러시아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아야 하였으나, 일제의 압력에 의해 뤼순(현재는 다롄의 일부)에 있는 일본 법원으로 송치되고 만다.

 

의거 소식이 들리자 한국은 물론 러시아·영국·스페인, 심지어 일본(!)에서까지 수많은 국제 변호사들이 안중근의 변론을 맡겠다고 몰려들었다. 그러나 선임이 불허되었고, 일제 측의 형식적인 절차로 관선 변호사가 변론을 맡는다

 

 

저격 후,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 (Корея! Ура!)”

 

라고 크게 외쳤다. 이 외침은 대한 만세라는 뜻이었다.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제국 공안들에게 피체되었고 최재형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일본이 아닌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했다. 하지만 안중근이 일본 제국 정부에 넘겨져 관동주 뤼순(료준) 감옥에 갇혀 19102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26일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같이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징역 16개월을 선고받았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까닭> 15가지.

 

안중근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재판과정에서 재판소내의 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

 

1.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14.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위의 3에서 5조약은 190511월 한일협약. 7조약은 19077월 한일신협약을 말한다.

 

*15에서 메이지 천황의 아버지 고메이 천황은 1867년 급사하였는데, 공식적으로는 자연사로 되어있지만 막부정권 측의 독살, 혹은 그가 토막에 대해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존왕파의 독살이라는 설도 있다. , 위에서는 존왕파의 이와쿠라 토모미가 고메이 천황을 독살했다는 설을 취한 것이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 사이가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안중근의 체포와 수감 소식을 접하자 당시 국내외에서는 변호 모금 운동이 일어났고 안병찬과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변호를 자원했으나 일제는 일본인 미즈노 기타로(水野吉太郞)와 가마타 세이지(鎌田政治)를 관선 변호사로 선임했다.

 

2018년 4월 20일에 일본 외무성 공문서관과 러시아 극동 문서 보관소 하바로프스크 도서관에서 ‘한국 주차군 참모장 아카시 모토지로 보고’라는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일본군 참모장이었던 아카시 모토지로(1864년 ∼ 1919년)가 중국 현지 밀정들을 통해 입수한 정보로 작성한 이 문서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의 배후를 캐내는 데 목적이 있었고, 문서에서는 안중근이 1906년 8월 고향을 떠나 간도 용정에 망명한 것은 당시 간도에서 서전 학교를 세워 운영하고 있던 이상설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서였다고 적고 있다(1907년 고종의 명을 받아 헤이그 특사로 갔던 이상설을 모셔오기 위한 모금 운동도 안중근이 주도). 보고서에서 '안응칠은 이상설에 의탁해서 당시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와도 합의해 간도에 갔다.’, ‘(유럽에 머물던) 이상설을 안응칠과 동지들이 모금해 연해주로 불러들였고… 안응칠은 간도에서 이상설을 사사했다.’등 이상설과 안중근의 사제 관계를 언급한 부분이 등장하는데, 보고서 말미에는 ‘조선 통감부 촉탁 경시 사카이의 신문’에서 안중근이 이상설을 두고 “포부가 매우 크며 세계 대세에 통해 동양의 시국을 간파하고 있다. 만인이 모여도 상설에는 미치지 못한다. 용량이 크고 사리에 통하는 대인물로서 대신(大臣)의 그릇이 됨을 잃지 않았다.”고 호평하고 있어, 안중근의 사상에 이상설이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마지막 행적

 

2008325일 국제한국연구원은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은 214일부터 순국한 326일까지의 행적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공개하였다.

 

1910214: 오전 1030분 관동주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음. 안중근은 당시 천주교 조선대목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보를 보내 사제를 보내줄 것을 요청함. 자신의 사형 집행일로 성금요일을 희망한다는 뜻을 전함.

 

1910217: 안중근은 고등법원장을 면담하여 한 국가의 독립을 위한 의병장으로서의 행동을 살인범으로 심리한 것에 이의를 제기함.

 

191039: 고해성사를 조제프 빌렘 당시 황해도 천주교 신천본당 주임신부에게서 받음.

 

1910310: 빌렘 신부의 집전으로 마지막 미사를 봉헌.

 

1910325: 사형 집행 연기. 세계적으로 성탄절, 정월 초하루, 황제의 탄신일에는 사형이 없다는 관례와 대한제국내의 의병활동이 강하게 전개되고 있어 통감부에서 이를 고려, 사형을 연기 요청. 이날은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태어난 건원절이었음.

 

이에 안중근은 면회를 온 두 동생에게 당부를 남김. 당부 내용은 노모의 안부를 묻고, 불효의 죄를 용서를 청하였고, 장남을 천주교 사제로 길러 달라고 부탁. 동생 안정근에게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 공업 또는 식림 같은 한국을 위한 일에 종사토록 부탁.

 

1910326: 오전 10시 사형 집행. 향년 32. 참석자: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

 

 

 

유언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여한이 없겠노라."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시신을 고국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형된 그날 밤 한 일본 간수가 그의 시신을 뤼순 감옥 터 뒤에 황급히 매장했다고 한다.

 

이후 194511월 중화민국에서 돌아온 백범 김구는 순국한 독립운동가의 유골을 찾아 국내에 봉환하기로 한다. 이듬해 6,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독립운동가 세 명의 유골을 일본에서 찾아온 후 효창공원에 안장하지만 안중근을 위해서는 네 번째 '허묘'를 만든다. 이것은 안중근의 시신을 꼭 찾겠다는 김구의 결심을 보여준다.

 

하지만 김구 역시 1949년 안두희의 암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게 되었다.

 

20083월 남북 정부는 광복 이후 처음으로 안중근 유해 공동으로 랴오닝 성 다롄(大連)시 뤼순(旅順) 감옥 뒤편 야산 일대 등지에서 발굴에 나섰지만 실패하였다.

 

 

 

 

 

 

 

순국 5분 전 모습. 어머니가 짠 새하얀 수의를 입고 찍은 사진이다.

1910214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이후 326일 오전 10시 15분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사후<*죽음 뒤>

 

안중근은 자신이 사형 당하면 조국에 운구하여 매장해줄 것을 최후로 당부했다. 그러나 사형당한 그의 시신은 뤼순 감옥의 죄수 묘역에 묻혔다. 일제는 뒤에 안중근의 정확한 매장지를 알려주지 않아 그의 매장지를 찾을 수 없었고, 현재까지도 공식적으로는 유해가 묻힌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2011년 출범한 안중근 유해 발굴 및 국내 봉환을 추진하는 비정부 민간단체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는 안중근이 순국한 뤼순 감옥에서 동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뤼순감옥구지묘지를 안중근의 유해 매장지로 추정하며 해당 지역에 대한 발굴을 정부에 의뢰하고 있는 상황이다.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는 19091026일 중국 하얼빈에서 일본의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한국의 독립운동가 안중근(安重根)의 유해(遺骸)를 찾아 국내로 봉환하는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2011년 출범한 비정부 민간단체다.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의 출범은 김영광으로부터 시작된다. 3선 국회의원 출신 김영광은 1980년대부터 중국 뤼순(旅順)을 답사하며 안중근 유해 매장지역을 추적해왔다. 그리고 마침내 뤼순감옥 동쪽에 위치한 감옥묘지를 안중근 유해매장지역으로 확신하고 해당 지역에 대한 발굴을 주장해왔다. 2010913일 김영광이 숙환으로 사망하자 김영광을 인터뷰했던 EBS 교양문화부 소속 PD 안태근은 자신이 직접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를 조직, 김영광이 주장해왔던 지역에 대한 발굴을 정부에 촉구하고 있다.>

 

19623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으로 개정)이 추서되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들에게 사상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이승만과 김구는 광복 이후로 매년 그를 기리고 그의 동상을 찾아가 헌화, 참배하였다. 윤치호를 포함하여 일부는 역시 그의 사상에 대체적으로 공감하기는 하나, 하얼빈에서의 일은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로 한일병합조약을 촉진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적인 생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온건론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죽여 한일 강제 병합을 앞당겼다'는 주장하는 것에 이미 을사늑약 등에 이토 히로부미가 활발히 참가해 왔고 조선을 일본에 종속시키려는 장기적 계획이 일본 내에서 꾸준히 논의되어왔으며(대한시설강령 등) 일본의 각의는 19097월에 조선 병합을 가결하고 가쓰라 수상을 필두로 병합을 추진 중이었다. 이는 이토 히로부미가 죽기 3개월 전이다.

또한 안중근이 누구를 저격했는가를 떠나서, 처음으로 독립을 위해 일본 고위 관료를 사살했기 때문에 이후 의열단을 비롯한 독립 운동 단체들이 일본 관료 암살과 조선총독부 등의 기관 폭파 등을 통한 독립을 얻고자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당시 동아시아의 지성인, 정치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량치차오, 장타이옌, 쑨원, 위안스카이 등이 추모와 애도의 글을 발표하였고, 1927년부터 중화민국에서는 장쉐량의 지시로 동북 각지의 36개 모범소학교에서 수업 전에 안중근을 기리는 노래를 합창하게 하였다. 중일 전쟁 발발 이후에는 저우언라이 등 공산당 측 정치인도 무한, 창사 등지에서 화극 안중근의 공연에 참여해서 반일 투 <*이글 뒤로는 없음>

 

혁명가 김산은 춥고 긴긴 겨울밤에 학교 기숙사에서 우리는 수많은 수행원들을 데리고 기차에서 내려온 이토히로부미를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어떤 식으로 저격했는가 하는 이야기와 한국독립을 위해 대담무쌍한 행동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많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라고 님 웨일즈의 아리랑은 수록하고 있다.

 

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안중근을 한국의 모세, 한국의 사도 바오로라고 부른다. , 안중근을 한국 교회에서는 모세의 애국심과 바오로의 신앙심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평가한 것이다.

 

김삼웅은 안중근의 동양평화 제안을 유럽공동체(EU)와 같은 것으로 평가한다. 당시 안중근의 제안 내용은 한국, 중국, 일본이 동양평화회의를 결성하며, 여순을 중립화하고, 관련 3국으로 운영되는 동양평화회의본부를 여순에 설치한다. 또한 평화지역 창설, 공동개발은행과 공동화폐 발행 등이 포함되어 있다.

*김상웅(金三雄, 전남 완도 소안고등학교 졸업.1943년 3월 3일 ~ )은 대한민국의 작가·언론인으로 성균관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독립기념관장,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을 역임함.

 

청산리 전투주역 김좌진은 안중근의 의거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20세기 초 우리나라 반일애국운동가”, “일제의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애국열사”로 평가하며 북조선의 역사서인 “조선전사”에 저격장면, 계기 등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안중근의 일본인 교도관 다카오 미조부치는 그를 동아시아의 의인이라고 평하였다.

 

안중근이 자신을 존경했던 일본인 간수 지바에게 남긴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은 군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이라는 글귀는 현재 대한민국 국군의 표어 중 하나가 되었다.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사전인 고지엔(広辞苑)이나 맥오에스에 기본 탑재되어 사용률이 꽤 높은 다이지린(大辞林) 같은 사전에는 안중근을 독립 운동가로 소개하고 있다.

 

당시 옥중에서 그의 고귀했던 성품, 대의명분, 그리고 인성을 본 일본인들은 안중근을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특히 그의 재판에 관련했었던 검사, 변호사, 그리고 뤼순 감옥의 간수들도 그를 존경했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지금도 일본 미야기현 구리하라시에 있는 다이린지(大林寺)라는 사찰에는, 안중근을 존경했던 간수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와 안중근의 위패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爲國獻身軍人本分>(나라를 위해 헌신함은 군인의 본분이다)이라는 유묵을 써서 지바에게 주었는데, 지바는 이를 평생 소중히 간직했으며, 1980년에는 한국에 반환되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유묵 외에도 총 26점이 일괄하여 보물 제569호 안중근 의사 유묵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그의 재판을 맡았던 일본 판사 히라시는 그가 그의 책(동양평화론)을 완성할 수 있도록 그의 사형일을 재판이 끝나고서 몇 달 후에 집행하려고 했으나, 도쿄에서의 직접 명령으로 인해 미룰 수 없었다고 한다. 지바 도시치의 이야기

 

 

 

동양평화론

 

동양 평화론의 서문에서 안중근은 만약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지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 황인종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는 의론이 한국·청국 두 나라 사람의 마음속에 용솟음쳐 위아래가 한 몸이 되어 스스로 여러 사람 앞에 나설 수밖에 없음이 불을 보듯 뻔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면...(若政略不改 逼迫日甚則 不得已寧亡於異族 不忍受辱於同種 議論湧出於韓淸兩國人之肺腑 上下一體 自爲白人之前驅 明若觀火之勢矣. 然則...)”라고 서술하였다.

 

서문의 설명처럼 안중근은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 평화론에서 하얼빈 의거를 동양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말하고 동양평화론이란 한··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상호 부조하여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에 대응하는 체계를 만들 수 있다는 방법론까지 제시하고 있었다.

 

내용을 보면 이토 히로부미가 바라는동양평화(東洋平和)’는 이웃나라를 침략해 일본에 종속시키는 것이었고 반대로 일본식 동양평화를 주창하는 이토에게는 안중근은 동양평화의 교란자였다.

 

이러한 이토를 제거하기 위하여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일으켰고 이후 5개월간의 수감생활과 공판과정에서 안중근은 이토의 사살이 동양평화를 지키려는 정의의 응징이었음을 줄기차게 강조했다.

 

미완성의 옥중 저서가 된 동양 평화론하얼빈 의거동양평화의전(東洋平和義戰)’으로 기술하고 있다. 사형장에서의 최후 발언도 나의 이 거사는 동양평화를 위하여 결행한 것이므로 임석 제원들도 앞으로 한·일 화합에 힘써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였다.

 

 

 

동양평화론에 대한 평가

 

중화인민공화국 하얼빈 시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 중국인들은 안중근 의사가 추구한 동양평화의 정신을 오늘 중국인도 배웠으면 한다고 말하면서 안중근 의사의 동양 평화론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아도 선구적인 사상이라며 한국에서 안중근의 평화 사상을 왜 국제화하지 못하는가라고 묻는다. 이들은 안중근이 뤼순 감옥에서 최후진술하기 위하여 1910212일 관동도독부 법정 제5차 공판에서 당당히 밝힌 것도 동양평화를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였다고 말한다. 이것이 20세기 넘어 서구 유럽 등에서 구상한 평화보다 70년이 앞서는 사상이었다는 것이다.[출처 필요]

 

안중근이 지향하는 평화는 한··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상부상조하는 길을 찾았고, 이를 통해 서양세력이 동양을 점령하고자 하는 서구 제국주의를 막을 때 동양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고 더 나아가 일본이 침략적 속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대동아공영권 논리의 함정과 모순을 이미 꿰뚫어보았기에 이에 대한 대안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해 발굴 시도

 

그가 처형당한 뒤 두 동생이 유해를 인수하기 위해 찾아왔지만, 일본 당국은 안중근 의사의 묘지가 독립 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해, 온갖 트집을 잡으며 유해를 끝끝내 넘겨주지 않았다. 유해는 뤼순 감옥 인근 죄수 묘지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나, 기독교 묘지에 매장되었다는 내용의 당시 러시아 신문 기사가 발견되었다.

 

안타깝게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김구는 삼의사의 유해를 찾으려 시도했으나 암살당하며 흐지부지 끝나버렸고 유해 발굴에 호의적이던 장제스가 국공내전에서 패전, 이후 공산 중국의 성립과 한국전쟁, 냉전으로 중국과 교류가 끊기다시피 해 남한 측 주도로 찾는 것은 사실상 기대할 수가 없어졌다.

 

현재 안중근 매장 지역으로 추정되는 지역으로 둥산포, 원보산, 뤼순감옥 박물관 부지 등 3곳이며, 특히 원보산은 당시 뤼순감옥 전옥(소장) 딸 이마이 후사코의 증언 등을 토대로 2006년 남북공동조사단 등이 지목했다.

 

공산화된 중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한 북한의 경우 안중근을 높게 평한 김일성은 1970년대에 직접 주석 명령을 내려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우생 씨를 단장으로 하여 조사를 벌였고, 1986년에도 북한은 대규모 유해 발굴단을 보내 조사를 벌였다고 하며 물론 둘 다 실패하였다.

 

또한 뤼순 주변은 대부분 1930년대 이후 여러 차례 개간되어 이미 1910년대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고, 2008년 남북 공동으로 진행한 발굴 사업에서도 결국 유해를 찾지 못해 사실상 그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희박하다.

 

형장에 걸린 밧줄에서 수직으로 2m쯤 아래에는 나무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교수형을 당한 시신을 바로 이 상자 안으로 떨어뜨린 뒤 흙으로 덮으면 사형 집행이 모두 끝나는 형식으로 사형이 이뤄졌다. 안 의사의 처형은, 그러나 이곳이 아닌 본관과 교수 형장 사이의 공터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남은 것은 안 의사가 처형된 곳임을 알리는 현판 하나가 전부. 사형을 당한 시신들은 나무 상자에 넣어져 땅 속에 묻혔다. 이 중 어딘가에 안 의사의 유해가 있지만 아직까지는 찾지를 못했다. 안 의사의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에 대한 기록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MBC 뉴스 19978월 여순 형무소 안중근 의사 순절 현장 취재 내용 -

 

20103월 중엽, 정보 통제 기간이 끝난 일본의 기밀 정보 중 일부가 일반 정보로 풀리면서, 일제가 안중근 의사를 체포한 이후 철저하게 감시했고 재판에도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였단 자료가 튀어 나왔다. 그동안 일본은 안중근 의사의 체포와 이후의 심문과 사형에 이르는 재판 과정에 일체 개입을 하지 않았으며, 당시 효력을 발하던 국제법에 따라 매우 공정한 재판을 진행했다고 주장해 왔으나, 풀려버린 자료에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내용이 다수 실려 있어 결국 사과의 의미로 유해 발굴에 협조하겠다는 공문을 보내왔고 중국 정부도 당시 재판 과정에 대한 책임을 마무리하기 위해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결국 안중근은 고국이 광복을 맞이하였음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 연유로 효창공원의 삼의사 묘역에 허묘로 비도 없이 모셔져 있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다시 해빙무드로 들어선 2018814, 문재인 대통령이 독립유공자 유족 초청 청와대 오찬에서 북한과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을 공동 추진하겠다고 했다.

 

한편 기독교 묘지에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옮겼다는 당시 러시아 언론의 기사가 발견되었다. 이에 따라 수소문 끝에 1880년대에 덴마크인이 뤼순에 기독교 묘지를 만들었고 일부가 남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조사에 나설 것이라고 한다.

 

 

 

가족사

 

사실, 안중근의 집안이 통째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독립 운동 때문에 일가가 중국·미국·북한 등으로 뿔뿔이 흩어진 탓에 이들의 후손들 대부분이 외국에 살고 있어, 안중근의 유명세에 비해 이 집안에 대한 정보는 한국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안중근의 고명딸 안현생만 해도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2010325일에야 '해방 후 귀국해서 1953~ 1956년에 효성 여자 대학교(대구가톨릭대학교) 불문과 교수로 재직했다'는 공식 기록이 나왔다고 한다.

 

이후 안중근의 장남 안문생(안분도)은 어렸을 때 일제에 의해 독이 든 과자를 먹고 복통을 호소하다 독살당한다.

 

이것 때문인지 안중근의 차남인 안준생은 그 뒤 변절, 1939년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키치(伊藤 文吉)에게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는 발언을 하고, 나중에 소위 이토 가문과의 화해란 명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모시는 사찰에서 이토 분키치에게 공개 사죄하는 퍼포먼스를 저질렀다. 이 일은 친일 매체에 의해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

이에 분노한 김구가 "민족 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安俊生)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했으나 그들이 실행치 않았다"고 백범일지에 적혀 있다.

 

안중근의 아버지는 김구가 동학 접주로 활동해 일본군에 쫒길 때 보호해준 적이 있고 안중근의 집안 대부분이 독립 운동에 헌신했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출범 후에는 김구와 함께 활발한 활동을 폈다.

 

그런데 안공근은 말년에 김구와 파벌을 달리해 활동하다 1939년에 상해에서 실종되었는데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안공근의 사인은 당시 중국 경찰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밝히지 못했다. 하지만 안공근이 핵심으로 활동한 한인 애국단이 이봉창의 천황 폭탄 투척, 윤봉길의 상해 의거 등을 주도한데다 당시 상해에서 일제의 간첩 공작이 활발했던 것을 고려한다면 안공근은 일제 밀정에 의해 언제 암살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장부가(丈夫歌)

 

안중근은 의거를 거행하기 전 <장부가(丈夫歌)를 지어 우덕순에게 주었으며, 우덕순도 거의가(擧義歌)로 답하였다.

<장부가는 안중근의 친필로 된 한시와 한글시가 함께 전해진다. 안중근은 장부가(丈夫歌)에서 대한제국을 침탈하고 국가를 멸망에 이르게 한 일본인 출신 이등박문을 '쥐새끼' 라고 지칭하며 강력한 적대감을 드러내었다

 

丈夫處世兮 其志大矣 장부가 셰상에 쳐ᄒᆞᆷ이여 그 ᄯᅳᆺ이 크도다

(장부가 세상에 있음이여, 그 뜻이 크도다.)

 

時造英雄兮 英雄造時 ᄯᆡ가 령웅을 지음이여 령웅이 ᄯᆡᄅᆞᆯ 지으리로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雄視天下兮 何日成業 텬하ᄅᆞᆯ 웅시ᄒᆞᆷ이여 어니 날에 업을 일울고

(천하를 웅시함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꼬.)

 

東風漸寒兮 壯士義烈 동풍이 졈드 차미여 쟝사에 의긔가 ᄯᅳ겁도다

(동풍이 점점 참이여, 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憤慨一去兮 必成目的 분ᄀᆡ히 한 번 가미여 반다시 목젹을 이루리로다

(분개히 한 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鼠竊○○兮 豈肯比命 쥐 도젹 ○○이여 엇지 즐겨 목숨을 비길고

(쥐 도적 ○○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꼬.)

 

豈度至此兮 事勢固然 엇지 이에 이ᄅᆞᆯ 쥴을 시아려스리요 사셰가 고여하도다

(어찌 이에 이를 줄을 헤아렸으리오, 사세가 본디 그러하도다.)

 

同胞同胞兮 速成大業 동포 동포여 속히 ᄃᆡ업을 이룰지어다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萬歲萬歲兮 大韓獨立 만셰 만셰여 ᄃᆡ한 독립이로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독립이로다.)

 

萬歲萬歲兮 大韓同胞 만셰 만셰여 ᄃᆡ한 동포로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동포로다.)

 

원문에서 '○○'으로 복자(숨긴 글자) 처리되어 있는 부분은 맥락상 당연히 '伊藤(이등)', '이토'. 이토가 예뻐서 복자 처리한 건 물론 아니고() 거사를 앞둔 상황에서 정보 누설을 막기 위함이었을 듯싶다.

 

 

 

연보

 

187992: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부 안태훈 모 조마리아 사이에서 출생.

1894: 16세에 김아려와 혼인. 김구와의 첫 만남.

1896: 부친 안태훈이 천주교에 입교.

1897: 19세에 천주교에 입교.

1898~ 1904: 천주교 전교 사업. 천주교대학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불발.

1905: 부친 안태훈 사망

1906: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운영하였으며 서북학회에 가입.

1907: 석탄회사 삼합을 설립하였으나, 같은 해 81일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만주로 망명했다.

1908: 19087월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19091026: 거사

1910214: 일본제국 재판부는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 (당시 재판관할권은 일본에 없었음.)

 

1910326: 오전 1015분 순국.

 

 

 

저서 및 유묵

 

안중근은 옥중에서 동양 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다. 이 책에는 일본이 3국 간섭으로 인해 뤼순을 청나라에 돌려준 뒤 한··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어 세 나라에서 대표를 파견하고 평화회의를 조직하고 3국 청년으로 구성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언어를 배우게 하며,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만들자는 주장이 들어 있다.

 

또한 안응칠 역사(安應七歷史)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집필하였다. 이 자서전의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일본어 번역본과 한문 등사본이 전해진다. 이 자서전을 저본으로 하여 1970년에 출판된 안중근 자서전이 있다.

뤼순 옥중에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이것들 중 몇몇이 보물 제569호 안중근 의사 유묵으로 지정됐다. 이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보물 제569-2호인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등이 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는 예전부터 전해지던 말이다. 조선 후기에서 말기 사이의 작자 미상의 글인 추구(推句)에도 나온다. 추구는 여러 책에서 좋은 글귀를 뽑아놓은 초학자용 한문 교재로, 원출전은 주지유의 답야절문(答野節問)에 수록된 사언구 "三日不讀, 口生荊棘; 三日不彈 手生荊棘" (3일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고 3일간 가야금을 타지 않으면 손에 가시가 돋는다)이다. 이 말은 하루라도 책을 보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매일 교양을 쌓지 않으면 언행이 거칠어진다(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뜻이다.

 

 

 

김구와의 인연

 

백범 김구가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후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청학동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을 때 처음 대면하였으며, 김구는 그가 총으로 사냥을 잘하며 남자다웠다고 평하였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후 그의 부인 등의 유족을 우덕순, 김구 등이 돌보았으며 안중근의 동생인 안공근은 상하이에서 김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안정근은 김구와 직접 연결되지 않고 안창호를 따랐지만, 안공근은 김구의 부하가 되어 한인애국단과 한국독립당특무대를 조직하는데 동참한다.

 

 

 

안중근의사 칭호 논란

 

안중근 의사(義士) / 장군의 호칭 문제는 꽤 오래된 문제다.

 

일부 '의사'로 지칭하는 것이 안중근의 업적을 폄하하기 위해 일본이 뒷작업을 한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이는 명백히 잘못된 사실이다. '의사'란 무력(武力)으로써 항거하여 의롭게 죽은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로 '의사''장군' 모두가 안중근의 업적을 기리는 칭호다.

 

'장군' 칭호의 유래를 살펴보면 안중근이 하얼빈 의거 직후 체포되었을 때 자신의 신분을 '조선 의용군 참모 중장'으로 밝힌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도 안중근은 북간도에서 김두성과 이범윤의 도움을 받아 일으킨 의병 내에서 참모 중장의 직책을 맡았다.

 

그러나 이 이후 행적에 의해 안중근 칭호에 '장군'이 적합한지 여부가 문제된다. 북간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안중근은 국내에서 의병 활동 중인 홍범도에게 군수 물자를 지원할 목적으로 국내 진격 작전을 펼치게 되는데 두만강을 건너기 직전 일본인 상단을 생포하게 된다. 이에 반일 감정이 극도로 달하던 의병들이 생포자들을 처형할 것을 주장하나, 안중근은 이들을 풀어주게 될 경우 다른 일본인들에게 조선의 의로움을 전파하여 궁극적으로 조국의 독립에 도움이 될 것이라 주장하며 풀어줄 것을 주장한다.

결국 이 사건을 시작으로 의병 조직 내에 분열이 일어나며, 이후 일본군과의 충돌에서 패퇴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 이후 안중근은 엔치야를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피난하고 그곳에서 단지 혈명을 결성한 뒤 이토를 사살하게 된다.

 

결국, 안중근이 의병 '장군'으로써 활약한 활동상은 사실상 미미하다 할 수 있기에 '장군'의 칭호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이토를 사살하고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한 것을 무력으로 항거하여 의롭게 죽은 것을 보아 '의사'라는 칭호가 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장군이란 칭호는 적국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군인의 모습이 부각된다. 그에 비해 의사라는 칭호는 일제 전체에 무력과 정신으로 맞선 애국자로서 그의 업적을 더 넓게 인정할 수 있다.

 

다만, 안중근 의사의 이후 법정 진술을 볼 때, 안중근은 스스로를 군인의 신분으로 이토를 사살한 것으로 주장하였던 바를 고려하여 장군 칭호를 선택할 필요성도 있을 것이다.

 

결국, '의사''장군'의 호칭 문제는 안중근이라는 인물을 어떤 시선에서 바라보는지에 대한 차이에 불과할 뿐 어느 쪽을 사용하건 안중근의 업적을 결코 폄하한다고 할 수 없다고 하겠으며, 사실 이 항목 또한 '의사'라는 표현이 격하하는 표현이라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른 정보를 알리기 위한 것으로 어느 한 표현만 맞는 표현이라고 결론을 내리지 않았음에 유의하자.

 

실제로 민간에서는 "의사"라는 칭호를 주로 사용하는 편이며, 군 내부에서는 "장군"이라는 칭호를 주로 쓰고 있다.

 

 

 

평가

 

순종은 이토 히로부미의 사망을 전해 들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칙문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은 미치고 도덕이 없는 자'이며, '장춘단에서 이토의 추도식을 성대히 열도록 하라'라는 것이었다. 순종 황제의 칙문이 본심이었는지는 논란이 있다 

본심이라는 근거는 이토 히로부미는 순종 황제가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하던 인물로, 순종 황제는 실제로 이토 히로부미를 '친절하고 자신의 부족한 점을 잘 챙겨주는 할아버지'로 여겼었다. 더욱이 순종 황제가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즉위 당시에도 정치에 관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의 한 측면만을 보고 그를 평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관점을 따른다면, 순종이 발표한 칙문은 그의 진심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순종의 이러한 칙문은 순종의 정치적 감각이 0에 가깝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점을 눈여겨 본 친일파들이 이토의 장례 절차가 모두 끝난 후 한일 합방을 해야 한다고 드러내놓고 준동하기 시작한다.

 

반대 의견으로는 순종 황제의 어머니가 일제에게 죽임을 당한 명성황후이다. 과연 정말로 순종 황제가 이토 히로부미를 진심으로 가깝게 생각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당시는 아버지인 고종이 일제에 의해 퇴위되었으니 순종의 정치적 감각이 높든 낮든 대외적으로는 일제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이승만은 전형적인 외교독립론자로, 무력투쟁에 대해 혐오하는 태도를 보였다. 전년도인 1908, 친일 외교 고문으로 한일 합방을 지지하고 홍보하는 친일 외교관 더럼 스티븐스를 전명운과 장인환이 사살했을 때의 미국 여론을 겪어봤던 이승만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승만은 윤봉길의 의거에 대해서도 비판한 바 있을 정도로 무력을 사용한 독립 운동가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성향이었다.

안중근이 일본의 거물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이렇게 되자, 미국 각종 언론 신문에는 '한국인들은 잔인한 살인마이며 무지몽매하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자주 실리곤 하였다. 어떤 학생들은 한국인인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교수들은 나를 무서워해서 만나주지 않았다.

 

위의 미국 분위기에 대해 참고할 점은 진주만 공습 이전까지 미국의 정계나 사회가 매우 친일적이고 와패니즈에 젖어있었다는 것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시어도어 루즈벨트 등 정치인들은 일본을 아시아의 백인들처럼 대우했고 뒤의 일이지만 헨리 스팀슨처럼 일본으로 여행가거나 일본 문화에 심취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미국 사회가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무지몽매한 살인마로만 본 것은 아닌데 앞서 의거를 했던 전명운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방면 되었고 장인환은 판사들이 애국심에 의거하여 본 행위라고 판단하여 형량을 10년으로 낮춰줬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를 비롯한 미국 신문들도 '스티븐스는 한국의 공공의 적'이라는 제목으로 더럼 스티븐스 저격 사건을 보도하여 한국에 대한 입장을 이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승만은 이러한 미국인들의 한인사회에 대한 동정적인 분위기보다는 미일관계에 따른 정치외교적인 모습에 더 치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해방 후에는 그 나름대로 예우를 갖춰 19590529일 이승만은 안중근 의사에 헌화하고 참배했다.

 

 <이 글 나온 곳; 다음백과, 위키백과, 나무위키>

 

 

 

 


안중근 의사 혈서 태극기 

 

안중근(의사, 장군)이 혈서로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고 쓴 태극기  

출처 © Ahn Jung-Geun/wikipedia| 이미지 사이즈 374x261| Public Domain|

 

 

 

보물 제569-2호 "안중근의사유묵" <위키백과에서>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음: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뜻: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안중근, 안중근유묵, 1910년 3월,
137.4x33.4cm, 보물 제569-7호, 신수1183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기 전까지 40여 일 동안 쓴 수백 점의 유묵에 대한독립과 동양평화에 대한 열망을 담았습니다. 현재까지 국내외에서 확인된 유묵은 62점이고, 그 가운데 26점이 우리나라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庸工難用連抱奇材(용공난용연포기재)”라는 유묵의 한 점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재주가 서투른 목수는 아름드리 커다란 기이한 재목을 잘 다루지 못한다”는 뜻으로, 큰 인물이 아니면 뛰어난 인재를 기용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유묵은 순국하기 직전인 19103월에 쓴 것으로 이 유묵의 庸工難用連抱奇材라는 글귀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의 한 구절을 변형한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 항일운동 프랑스 신부들이 박대  

 

 

 

 

 교회사 연구소 '뮈텔 교교 일기' 번역 공개

 

 

 

 

이등박문 처단 "증오할 살인"으로 규정. 안 의사 시신 가족 인도에도 비협조

 

 

 

 

<1996년 9월 24일 치. 중앙일보에서>

 

 

 

 

 

 

 

 

 

<독립투사 유동하 일가의 유랑 80. 지금으로서는<2019. 03. 26일> 여기에 30여 년을 더해야>

 

 

안중근의 거사 동지들

 

 

 

유동하

 

 

 

 

 

1910214일 선고 공판

 

안중근(32) 사형, 우덕순(34) 징역 3, 조도선(38), 유동하(19) 각각 징역 16.

   

안중근은 판사의 주문낭독을 들으면서도 얼굴빛조차 변하지 않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한다. 최후 진술에서 그는 이렇게 될 것으로 예견한 지 오래다. 구차스럽게 목숨을 부지할 필요가 없으니 공소는 포기한다. 이보다 심한 형은 없는가라고 하여 방청객은 물론 일본인 판검사와 형리들까지 숙연케 했다 한다.

   

같은 해 3261015. 마지막으로 여순감옥 형틀의 층계를 오르며 그는 형리들에게 거사 동지 유동하를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고 전한다.

   

안중근 의사와 거사에 같이 나섰던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의사들에 대해서는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뒤 이들에 대한 행적이나 후일담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유동하의 경우에는 다행히 서울에 사는 친동생 유동은의 아들 유세종 씨와 강릉 유씨 대종회의 주선으로 만주 노령 폴란드 등 공산권에 흩어져 살고 있다 한다. 이 작업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은 198641일 치 歐州新聞의 고송무 씨의 글 유동하의사와 그 가족을 생각하며라는 글이었다.

   

1902년 일제의 한반도 침탈과 정국이 소요스러워지자 유동하 가족은 아버지 유승렬과 백부 유태열은 고향 원산에서 노령(露領)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하였다. 그에 앞서 유승렬은 한말 개화사상에 심취하여 개화당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개화파가 몰락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금강산으로 숨어 들어가 한의학을 공부 한의사가 되었다.

   

1889년에는 강 씨 집 규수와 혼인 뒤 첫딸 안나 첫아들 유동하 둘째 아들 유동은을 낳았고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 뒤 둘째 딸 동선, 셋째 아들 동주, 넷째 아들 동한을 낳았다. 유태열은 블라디보스톡 시내에 유승렬은 조금 떨어진 한인 집거구인 신한촌에서 살게 되었다. 유동하는 고등중학교 3학년 16살 되던 해인 1907년 이웃 마을 허씨댁에 장가를 들었다 했다.

  

앞서 나온 것처럼 안중근은 19077월 강원도에서 의병 봉기. 일군에 쫓겨 북간도를 거쳐 노령에 망명. 2년 뒤인 19097월 초 이범윤 최재형 등 민족지도자들이 이끄는 연추(煙秋)의병에 동지 우덕순과 함께 종군하였다.

  

이때 안중근의 직책은 좌익장군이었는데, 경흥에서 일본군 50여명을 사살하는데 큰 공훈을 세웠으나 회령에서 패전<이는 위에도 나오듯 국제공법에 따라 왜군 포로를 풀어주었기 때문>, 출전 한 달 뒤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곳은 유동하 아버지 유승렬 집으로써 유승렬은 이들을 잘 보살폈다 한다.

 

17, 8세의 유동하는 190910월 중순 그가 철로고등중학교 졸업반이었다. 이때 유동하는 노어판의 철로보란 신문 한 장을 아버지 유승렬에게 내보였다. 그 신문에는 이토가 10월 하순 만주에 온다는 기사였다. 이틀 뒤 한글 신문 '대동공보''요동보'에도 실렸다. 유승렬은 그날 저녁 기차 편으로 블라디보스톡으로 나가 사흘 만에 안중근 우덕순 등을 대동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유승렬과 안중근은 '대동공보'의 이강 등과 거사계획 및 여비염출을 의논했다, 그 당시 '대동공보'에서 일하던 형 유태열도 이 일에 가담했다. 몇 차례의 밀회가 유승렬 집에서 이루어지는 동안 동하는 밖에서 망을 보는 일을 맡았는데, 6명의 동지들이 백포에 혈서로서 맹약했다 한다. 제일 먼저 안중근이 왼쪽 엄지손가락을 깨물어 구국헌신이라 쓰고 서명하자 나머지 사람들이 혈서로 서명했다. 모두 7명으로 유승렬은 이미 40이 넘은 장년이라 거사 뒤 뒷일을 맡기로 하고 대신 아들 동하를 노어통역으로 딸려 보내기로 합의했다 한다.

   

21일 이들 일행은 블라디보스톡으로 출발했다. 하얼빈에 도착한 것이 22일 밤 9시경, 일행은 레스나야거리 28(지금 지단거리 40)의 김성백의 집에서 여장을 풀었다. 김성백은 유승렬의 딸 안나의 남편 되는 김성기의 친형이어서 유승렬과는 사돈 관계였다. 유승렬이 동하 편에 편지로 이들 일행을 간곡히 부탁했다.

   

김성백은 러시아 국적을 가진 사람으로 만주리와 포크라니치나야 사이의 철도공사에서 요직을 맡은 사람이어서 러시아인 사회에서 신망이 있었다. 더욱이 그는 슬하에 자식이 없어 러시아 풍습대로 막내아우 김성기를 후계자로 지정했었다. 사돈 유승렬이 편지와 함께 동하까지 딸려 보냈으니 이들 일행을 따뜻이 보살피고 후견인이 되어 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공판기록에는 이런 구체적인 사전모의나 유동하일가의 적극적인 참여 사실이 애매하게 은폐되어 있다. 이 거사는 어디까지나 안중근에 의해 주도되고 결행되었기 때문에 안중근은 자기 혼자만의 희생으로 일을 끝맺고 나머지 동지들은 끝까지 보호하겠다는 깊은 사려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중근 가족과 유승렬 일가의 교유

  

이등박문이 격살 되고 국내외의 여론이 회오리치자 블라디보스톡일대의 애국지사들 사이에는 일본 밀정과 군사경찰들이 가족들을 몰살하리라는 풍문이 나돌았다. 맨 처음 유승렬이 네수이라는 산골 마을에 숨었고, 나머지 가족들도 뒤따라 꼬르지프에서 50여리 떨어진 모르츠크라는 한인촌으로 피난했다.

   

11월 초 첫눈이 쌓인 밤길을 걷는 이들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등에 업혔던 아이들은 손발이 동상에 걸렸다. 이들이 다시 꼬르지프의 집으로 돌아온 것은 거사 동지들이 기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였고, 유승렬은 24일 언도 공판이 끝난 뒤에야 돌아왔다.

 

피신 생활에서 풀려나와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안중근 가솔들을 연해주로 모시는 일이었다. 그들은 편지 전보 등을 통해 안중근 일가가 연해주에 오도록 적극 권했다.

   

이를 계기로 연해주에 온 안중근 가족은 안중근 어머니를 비롯하여 부인 김아려와 동생 안정근 부부, 셋째 동생 안공근, 맏딸 현생, 장남분도, 차남 마태 등 모두 8명이었다.

 

이들은 유승렬 집에서 보름가량 지내다가 목릉에서 10리가량 떨어진 한인촌에 초가 한 채를 마련하고 그리로 옮겨가서 숨어 살게 되었다.

   

유동선의 회고에 따르면 이때 안중근 장남 분도(당시6)가 일본의 앞잡이인 한국인 밀정<배신자!>에게 독살당하는 참변이 있었다고 한다. 1911년 여름, 하얼빈 김성백의 동생 김성기에게 출가한 언니 안나가 친정에 다니러 와서 함께 목릉의 안의사 댁에 인사를 하러 가서 며칠 묵게 되었는데, 어느 날 강가에 나가 놀던 분도가 배를 끌어안고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하며 들어와 쓰러지는 것이었다. 식구들이 몰려와 연유를 물으니 한국인 낚시꾼이 과자를 주길래 함께 먹었다고 하며 눈을 치뜨며 말을 계속하지 못하다 어이없이 숨이 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뒤에 알려진 일이지만 이 낚시꾼은 일본인이 파견한 첩자였다.

   

안중근 가족은 그곳에 더 머물러 있기에 위험하다고 판단 노령 지도자들의 도움으로 상해로 이주했다. 얼마 뒤 안중근 가족들이 편지를 보내왔는데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신변의 위협 때문이라> 그 뒤 양가의 소식은 서로 끊기고 말았다.

   

유동하가 여순감옥에서 형기를 마치고 신한촌의 집에 돌아온 것은 19128월이었다. 모진 고문과 감옥생활에 시달린 동하의 몰골은 참대같이 말라 있었고, 얼굴은 백지처럼 창백하였다. 아내 허 씨와 어머니 강 씨가 그를 잡고 통곡하자 그는 형형한 눈빛을 발하며 안 선생은 목숨을 바쳤는데, 살아온 사람에게 왜 눈물을 보이십니까하며 오히려 가족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아버지 유승렬도 감동하여 대견해 했다 한다.

  

동하와 그의 동지들의 옥고는 참담한 것이었다. 그날 밤 식구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동하는 일본 관헌들에게 따귀를 하도 심하게 맞아 고막이 터졌고, 참대로 다리와 손에 주리를 틀려서 다리뼈가 쭈그러지고 손가락 네 개가 부러졌었다고 한다. 또 천장에 매달곤 가죽 채찍으로 때리고 벌겋게 달군 쇠꼬챙이로 양 볼을 지져대는 악형을 당했는데 나머지 세 동지도 똑같은 고초를 당했다 한다.

  

감동적인 일은 안중근이 교수대에 오르기 앞서 마지막으로 동양평화만세를 부르겠다는 부탁이 거절되자 그러면 다른 한가지 부탁이 있소. 유동하만은 아무 죄가 없으니 곧 석방해 달라고 요구하오라고 하며 끝내 유동하를 걱정하며 죽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나라를 찾는 일이라 할지라도 20세도 못 된 어린 소년이 모진 고초와 옥고를 치르는 것이 죽음을 앞둔 애국자의 가슴에도 못내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이들 가족에 대한 탄압과 협박은 가중되고 있었다. 유동하가 출옥하기 앞인 1911년 여름 하얼빈에서 유안나가 꼬르지프의 친정에 왔는데 김성백은 일본 요인들이 이곳에 올 때마다 예비검속을 당한다 했다. 김성백은 더는 견딜 수 없어 은밀히 이르쿠츠크로 이주할 계획이라 했다.

 

 

동지들의 죽음

   

1914년 유승렬은 가족들을 데리고 하얼빈으로 이주했다. 일본 첩자들의 눈도 피하고 사업도 크게 확장해 볼 계획이었다. 이때 거사 동지 조도선이 유승렬을 찾아왔다. 1년 남짓 의원 일을 익힌 그는 이듬해인 1915년 여름 북간도 국자가에 있던 정치원이란 한의사를 대동하고 모스크바로 들어가서 한의원을 개업했다.

   

조도선은 원래 러시아인이 경영하는 금광의 감독이었다. 노어도 잘했고 김성백과 친교가 있어서 의거에 가담했던 것인데, 출옥 뒤 적절한 직업을 가지지 못하고 전전하다가 유승렬의 인도로 한의사가 된 것이다. 1921년 정치원 노인이 죽자 국자가로 모시고 와서 정중하게 장례식을 올려주었다. 그러나 그도 2년 뒤인 1923, 감옥생활에서 얻은 지병으로 끝내 병사했다고 한다.

  

1917년 봄 유승렬은 동하만을 데리고 러시아 볼가강가의 도시 사마라<지금의 꾸이브세프>로 이주했다. 나머지 가족들은 김성백의 가족과 함께 이르크츠크로 옮겨놓은 뒤였다. 이 당시는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이 절정에 달해 궁지에 몰린 백군이 적군에 대항키 위해 일본군을 연해주에 출병시키는 등 각국의 군대가 러시아내전에 개입하고 있었던 때였다. 일본의 사주를 받은 백군은 은연중 우리 독립운동자들을 탄압하여 연해주는 물론 만주일대의 독립운동가들이 피해를 보게 되었다. 유승렬도 일본의 영향권에서 최대한 멀리 이곳 사마라에까지 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르크츠크에 정착한 유동하 가족은 그해 겨울 적군과 백군의 이르크츠크시가전의 와중에 휘말렸다. 밤낮 18일간 계속된 시가전에서 결국 백군이 패했으나 몇해를 계속한 전쟁으로 러시아 살림은 물론 주민들의 생활난은 극에 달했다.

  

유동하부자가 피신했던 사마라 역시 전화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유동하는 백군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탄압을 피하기 위해 적군계통의 한국인 청년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백군의 습격을 받고 한국인 청년 11명과 함께 붙잡히고 말았다.

   

백군은 유동하를 포함한 이들 한국인 청년 11명을 곧바로 볼가강 다리 위에 세워놓고 총살했다. 이때 김용팔이란 청년 한 사람만이 미리 물속에 뛰어들어 기적같이 살아났는데, 그는 갖은 고생 끝에 화물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에 돌아와 가족들에게 동하의 죽을 알려주었다 한다.

 

<*러시아 내전 당시 우리의 독립운동은 적군으로부터 무기를 사는 등 도움을 받아 전쟁을 치르는 상황이었고 반대로 백군은 왜의 도움을 받아 적군과 싸우던 터라 그들 요구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 문제는 배신자>

   

그 뒤 한 달이 지나서 유승렬도 편지로 아들의 죽음을 알려왔는데 사건의 발단은 동하가 속해 있던 한국인 청년단체 안에 한국인 친일 첩자 때문이었다고 했다.

  

18세의 어린 나이로 이등박문 격살 의거에 참여, 2년 가까운 옥고를 치르고서도 일제의 추격을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남러시아의 밤하늘 아래 사라진 유동하. 그때 그의 나이 26살이었다. 두 딸이 있었는데 부인 허 씨와는 이혼하고 러시아 처녀와 재혼했다 한다

 

 

가족들의 인생유전

   

유동하 가족의 수난은 유동하가 죽은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우선 유승렬 자신도 아들의 죽음을 겪은 지 얼마 안 돼 집에서 테러단의 습격을 받고 지하 통로로 피신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진 일이 있었다. 그는 더는 사마라에서 견디기 어려워 1920년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로 망명하여 이곳에서 한의원을 개업했다. 그는 개성의 송도고보에 다니던 막내 아들 동주를 데려다가 노후를 의탁하기로 했다. 동주는 아버지의 부름에 따라 송도고보를 마친 다음 바르샤바 의대에 진학, 의사가 됐다. 1936년 유승렬이 고향인 원산으로 돌아올 때 동주는 그대로 폴란드에 남아 있었다. 1938, 35년간 무려 네 곳의 남의 나라를 유랑했던 한많은 생애를 원산에서 마감했다.

   

한편 1918년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한 유동하의 가족들은 생활고와 가중되는 일제의 핍박을 견디지 못해 192210월 원산으로 귀국했다. 이때 둘째아들 동은이 원산에서 결혼하여 살고 있어서 그에게 의지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겨우 그해 겨울을 넘기고 19232월에 다시 만주로 유랑생활을 떠난다. 어머니 강씨와 둘째딸 동선, 셋째아들 동한 등 세 명의 일행은 원산에서 배로 청진까지, 기차로 회령까지 가서 거기서부터 도보로 삼합 삼상봉 노일령 동경성을 거쳐 40여일 만에 만주의 해림에 도착했다. 결국 이들 세 명의 일가만이 북만(北滿)의 신개지에 첫삽을 꽂았다. 이때 동선은 21세 처녀였고 동한은 12세의 소년이었다. 19262월 동선은 결혼하니 결국 어머니 강씨의 슬하에는 15세의 동한만이 남아 해림의 한국인 이민마을에서 평범한 농가를 이루게 된다.

  

 

우덕순과의 만남

 

동선이 결혼하기 앞인 1925년 여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아버지 유승렬이 보내는 생활비가 하얼빈 우체국으로 와서 그 돈을 찾으러 그곳에 나간 일이 있었다. 그때 어머니 강 씨가 우덕순이 하얼빈에 있다는 말이 있으니 한번 찾아보고 인사를 드리고 오라고 해서 힘겹게 그를 찾은 일이 있었다.

   

1909년 가을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의 유승렬 집에서 본 8살짜리 여자아이가 24세의 처녀가 되어 찾아왔으니 처음엔 알아보지도 못했다 한다. 동선을 통해서 옛날 거사동지들과 그 가족의 지나온 이야기를 들은 우덕순은 깊은 감회에 젖더라는 것이다.

 

옛동지 동하의 죽음, 조도선이 남러시아에서 한의사로 지내다가 감옥생활에서 얻은 골병으로 1923년에 죽었다는 이야기, 특히 거사의 뒷일을 맡아주었던 유승렬이 일제의 핍박을 피해서 하얼빈 이르쿠츠크 볼가강가의 사마라시로 해서 끝내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깊은 한숨을 짓더라는 것이다.

 

동선이 어찌 지내고 있는지 근황을 물으니 우덕순은 일본영사관의 감시와 핍박이 자심하며 "한인거류민회" 회장<*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을 맡고 있다고 했다. 거사 때 숙소를 제공했다는 이유만으로 예사로 예비검속을 당하는 등 고생하다가 이르쿠츠크로 이주해버린 김성백을 생각하니 동선은 우덕순의 처지가 이해가 가더라는 것이다.

 

그해 가을 또 하얼빈 우체국에 갔던 길에 다시 우덕순의 집을 찾았더니 이미 한 달 앞서 서울로 이사를 했더라고 한다. 그 뒤 유동하 가족과 우덕순과의 연락은 영영 끊긴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다.

  

그러나 가장 아쉬운 것은 동하가 죽기에 앞서 이혼한 허 씨 부인<*이도 왜의 감시 핍박으로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과 그의 소생들. 그리고 러시아 부인과 그의 소생들은 생사와 근황을 알 수 없는 일이다.

  

러시아에서 살고 있을 백부 유태열 일가와 김성기 가족, 유동하의 아들딸들의 근황이 밝혀져 이들이 한자리에 만나는 감격의 날이 꼭 오리라 믿는다. <*좀 긴 글이긴 하지만 빼고 빼고 해서 우리나라 둘렛길을 걸었던 그때 그 마음으로 옮겨 적음>

  

 

유동하

 

1892-1918. <*가장 강력한 독립운동을 하면서 그것도 왜군과의 전쟁도 아닌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일로 한밤중 남의 나라, 러시아 볼가강 다리 위에서 유명을 달리한 유동하 의사. 원통하기 짝이 없다. 배신자!>

 

 

조도선

 

1879-1923, 감옥생활에서 얻은 지병으로 남러시아에서 끝내 병사.

 

 

우덕순

 

1880-1950. 9. 20. 일본 영사관의 감시와 핍박이 자심하여 하얼빈 한인거류민회회장을 맡고 있다 함. 1925년 가을 서울로 왔다 함.

   

<나온 곳; 신동아. 198612월호. 이로부터 강산이 세 번이나. 안경도 모자라 돋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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