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독립 항쟁과 밀정

아리1 2019. 9. 7. 23:31

2019. 8. 13일. 강점기 독립 항쟁과 밀정 <한국방송공사 시사기획 '창'을 중심으로>

 

 

 

 

-이토 히루부미 처단 동지와 변절자

 

안중근 의사.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의거 동지.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안중근 사형, 우덕순 징역 3, 조도선 유동하 각각 징역 16개월. 

 

안중근.  <1879년 9월 2일 -1910. 3. 26일> 1910214일 사형 선고를 받음. 1910년 3월 26일 10시 15분 순국.

우덕순. <1880 ~ 1950년> 변절 밀정.

조도선. <1879 - 1923년> 감옥생활에서 당한 고문으로 병사.

유동하. <1892 - 1918> 한인 청년단 11명과 함께 왜의 도움을 받고 있는 러시아 백군에 잡힘.

역시 그 가운데 한인 친왜 첩자의 밀고로 볼가강 다리 위에서 내전 중인 러시아 백군<다른 글엔 백군을 가장한 왜병>에게 총살당함. 

 

 

 

 

밀정 1부 <배신의 기록>

 

 

 

 

 

김달하<2부에 나옴>, 김복<본명 김규흥>

 

 

 

 

김호 <본명, 김재영>  

 

 

우덕순<안중근의사 동지>

 

 

 

 

 

 

<한국방송공사에서는 천 사람의 밀정 발굴보다 한 사람의 억울함도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사실관계를 명명백백히 밝히리라 믿습니다.>

 

 

 

우덕순과 밀정 행각

 

 

 

 

보조금하부신청서

 

 

왜 외무성으로 보낸 보조금신청서. 대정14년<1925년> 하얼빈 조선인회장 우덕순

 

 

 

 

 

식민지 경영은 조선인 밀정들을 활용

 

 

 

상해에 있는 조선인 간부와 결사자 200여 명 <글로 봐서 의열단 움직임을 보고한 듯>

 

 

*이 글 오른쪽에서 세 번재 줄 '대정 8년<1919년> 7월 5일 조선군참모장 대야풍사'란 것으로 봐서

밀정<'김호'인 듯. 본명 김재영>이 1919년 조선군참모장 대야풍사<왜 참모장>에게

상해 조선인 간부와 결사자 200여 명이 담긴 사진을 함께 보낸 것으로 보인다.

 

<2부에도 나와 있지만 실제 의열단 창단1919년 11월 중국 동북지역 지린성에서>

 

 

 

상해에 있는 조선인 간부와 결사자 200여 명 <이 사진을 말하는 듯>

위 사진은 원본인  듯. 아래 사진들은 방송사에서 잘 알아볼 수 있도록 나누어서 찍음.

어른 아이 남녀 할 것 없이 결사자, 죽기를 각오하고 이 자리에 나온 것 같다.

 

 

 

 

 

 

 

 

 

 

 

 

 

 

 

<나온 곳. 한국방송공사 티비 화면>

 

 

 

 

우덕순과의 만남 <이는 올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순국일'편에 나온 것으로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함. http://blog.daum.net/jsarari/198>

 

유동선<유승렬의 둘째 딸>이 결혼하기 앞인 1925년 여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아버지 유승렬이 보내는 생활비가 하얼빈 우체국으로 와서 그 돈을 찾으러 그곳에 나간 일이 있었다. 그때 어머니 강 씨가 우덕순이 하얼빈에 있다는 말이 있으니 한번 찾아보고 인사를 드리고 오라고 해서 힘겹게 그를 찾은 일이 있었다.

 

1909년 가을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의 유승렬 집에서 본 8살짜리 여자아이가 24세의 처녀가 되어 찾아왔으니 처음엔 알아보지도 못했다 한다. 동선을 통해서 옛날 거사동지들과 그 가족의 지나온 이야기를 들은 우덕순은 깊은 감회에 젖더라는 것이다.

 

옛동지 동하의 죽음, 조도선이 남러시아에서 한의사로 지내다가 감옥생활에서 얻은 골병으로 1923년에 죽었다는 이야기, 특히 거사의 뒷일을 맡아주었던 유승렬이 일제의 핍박을 피해서 하얼빈 이르쿠츠크 볼가강가의 사마라시로 해서 끝내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깊은 한숨을 짓더라는 것이다.

 

동선이 어찌 지내고 있는지 근황을 물으니 우덕순은 일본영사관의 감시와 핍박이 자심하며 "한인거류민회" 회장<*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을 맡고 있다고 했다. 거사 때 숙소를 제공했다는 이유만으로 예사로 예비검속을 당하는 등 고생하다가 이르쿠츠크로 이주해버린 김성백을 생각하니 동선은 우덕순의 처지가 이해가 가더라는 것이다.

 

그해 가을 또 하얼빈 우체국에 갔던 길에 다시 우덕순의 집을 찾았더니 이미 한 달 앞서 서울로 이사를 했더라고 한다. 그 뒤 유동하 가족과 우덕순과의 연락은 영영 끊긴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다.

 

그러나 가장 아쉬운 것은 동하가 죽기에 앞서 이혼한 허 씨 부인<*이도 왜의 감시 핍박으로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과 그의 소생들. 그리고 러시아 부인과 그의 소생들은 생사와 근황을 알 수 없는 일이다.

 

러시아에서 살고 있을 백부 유태열 일가와 김성기 가족, 유동하의 아들딸들의 근황이 밝혀져 이들이 한자리에 만나는 감격의 날이 꼭 오리라

 

 

 

 

밀정 2부 <임시정부 파괴>

 

 

 

 

(독립) 선언서

 

 

붉은색은 공동조계. 노란색은 프랑스조계

상해 조계에는 영국 프랑스 미국 왜 등 수많은 나라들의 조계가 있었다.

  프랑스가 혁명의 나라였기 때문에 프랑스 만이 망명 정부를 인정해 주었다. <화면 글 옮김>

 

 

 

대한민국 원년 구월 십칠일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제6회 기념 촬영

 

 

 

 

 

 

상해 임시정부 및 여러 독립투쟁 단체

 

 

김복 변절사

 1. 김상설이 김복 데려옴 <김상설은 위의 밀정 이름에 없는 것으로 봐서 드러난 친왜파인 듯>

2. 왜에 의지해야 한다고 김복 말함

3. 그는 내가 하는 말에 크게 수긍하는 듯했다.

4. 김복, 거의 수중에 들어온 듯하다.

5. 김복을 초대 식사를 했다.

6. 밀정비에서 100엔을 줬다.

 

 

 

밀정 완성. 김복 <본명 김규흥>

 

 

김복

 우리 정부는 이자에게 밀정 공로(?)로 훈장을.

 

 

김복 <김규흥>

 

 

 

 

1919년 11월 29일 상해에서 경성 용산에 있는 우쓰노미야에게 김복이 회유 경과를 보고함

<김상설로부터 회유된 김복이 청출어람 김달하를 회유하는 듯>

 

 

 

 

식민지 경영은 조선인 밀정들을 이용

 

 

*김복 글 같은데 그 발전(?) 속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왼쪽부터 김달하 김복 우쓰노미아.

 활동비로 김달하에게는 3만엔, 본인 김복에게는 2만엔 요구. 그리고 '신속하게 김달하를 중용해 달라.'

<김달하. 1925년 4월 4일 임정 요인을 포섭하려다 잡혀 죽음>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사람들 

 

*여기서 창문 위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사월<射月>이란 현판이 보이는데,

이는 윤봉길 의사 의거일이 왜가 1932년 4월 29일 중과의 전쟁에서 이긴 날을 축하하기 위해

홍커우 공원에 모인 왜군 두목 등 많은 수의 깡패들을 처단한 날을 뜻하는 듯. 

 

 

 

 경무국에서는 국장 김구<초대 경무국장>를 비롯해 청년들로 된 20명 정도의 경호원을 둬서 신원을 여러 단계로 거치면서 검증한다.

 

 

 

 대한민국 2년<1920년> 2월 5일. 독립신문. 칠가살을 1면 가장 첫머리에 실음.

 

 

칠가살 <대한민국 2년<1920년> 2월 5일>

 

기사 제목: 칠가살(七可殺)

뜻: 죽여도 되는 일곱 가지 인간<인간은 왜놈식 한자어>을 말한다.
동포여, 용감한 애국자여, 양심이 없는 금수와 같은 적에게는 죽음밖에 줄 것이 없다.
생명을 해치는 것은 본디 옳은 것이 아니나, 금수의 한 생명으로 인해 국가가 큰 피해를 받는 상황이니 없애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우리의 적은 적의 우두머리, 나라를 판 적, 일제 앞잡이, 친일 부호, 적의 관리된 자, 불량배와 모반자를 말한다.

 

 

 

 

 

 

 

 

<나온 곳. 제목: 칠가살부터. historylibrary.net/>

 

 

 

프랑스 조계 쪽 대로에 한국인 여자 주검 발견

 

 

 

 

 

 

 

 

 

 

한태규. 위의 밀정 이름에는 없음

 

 

 

 

 

백범일지

 

 

 

 

김구에 대한 특종 공작 <왼쪽에서 네 번째 줄 '주범 김구 처치'>

 

 

오대근. 이자 역시 밀정 이름에 없음.

 

 

1935년 2월 김구 암살 공작범. 오대근 처단

 

 

여기서 무정부주의자 즉 의열단을 말하며 단장은 김원봉

 

 

 

대한민국 임시정부 (장사)활동 구지

 

 

남목청

 

 

조선혁명당 대표 현익철 선생 순국

 

 

김구 선생 심장 관통상

 

 

독립투쟁<운동은 왜놈식 한자어> 사람들 돈으로 사서<매수도 왜놈식 한자어> 저격케 함.

 

 

이운환 왜의 돈에 팔려 권총을 난사. 이자도 위의 이름에 없음.

 

 

김자동<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총알도 성능이 약해서? 총알도 차마......,

 

 

 

김구 선생

 

 

 

 

조선의용대<의열단> 단장 김원봉<아래 깃발 가운데>

 

 

의열단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한다.' 의열단 이름의 유래입니다. 


1919년 11월 중국 동북지역 지린성에서 창단된 비밀결사 독립운동단체가 의열단입니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독립운동을 겪은 뒤, 해외에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던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더욱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에 1919년 11월 9일 밤새 숙의한 끝에 그 이튿날인 10일 새벽에 급진적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항일 비밀결사인 의열단을 조직하게 된 것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의열단은 미온적이고 온건한 독립운동이 아닌 힘을 바탕으로 한 과격하고 급진적인 폭력투쟁을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의열단 창단 당시의 단원은 대체로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창단 단원이 약 13명 정도로 전해지고 그 가운데 단장이 김원봉이었습니다.

 

의열단은 창단 직후 ‘공약 10조’와 뒤에 ‘5파괴’, ‘7가살’이라는 행동목표를 기본규약으로 삼았는데, 그 가운데 암살대상으로서 ① 조선 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③ 대만 총독, 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⑥ 적탐(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등이 있었습니다. 파괴대상으로는 ① 조선총독부, ② 동양척식회사, ③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중요기관 등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관 및 그 관련 기관의 시설에 대한 폭파를 꾀하고 있었습니다. 

<네이버 포스트에서>

 

 

무정부주의<아나키즘>란,

아나키즘(영어: anarchism /ˈænərˌkɪzəm/, 프랑스어: anarchisme 아나르시슴[*])은 사회를 아나키의 상태로 만들려는 정치적 철학적 사상이며, 이러한 사상가는 아나키스트라고 한다. 아나키의 상태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배자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프루동은 그의 저서 《소유란 무엇인가》에서 아나키는 “주인과 군주의 부재”를 의미한다고 언급했다. 역사적으로는 고대의 공동체에서 비롯하여 갖가지 공동체나 고대의 철학, 사상에서도 연원을 찾아볼 수 있으나, 근대에 이르러 자본주의와 권위주의의 폐해에 대한 반발로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함께 발흥하였다. <위키 백과에서>

 

 

 

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 성립 기념 사진>

 

 

이 사진은 맨 처음 결사자 200여 명 사진과 같음.

 

 

 

 

 

 

조선의용대

 

 

*해방, 자유. 모두 왜놈식 한자어이니.

 

 

 

 

 의열단원

뒷줄 오른쪽부터 김원봉, 곽재기, 강세우, 김기득, 이성우. 가운데 정이도, 오른쪽 아래 김익상

 

 

김익상 <수사형. 드디어 수>

 

 

 김익상

 

김익상(金益相, 1895년~1943년 6월 6일). 독립운동가.


평양의 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기독교계 학교에서 교직에 종사하다가 서울에 올라와 광성연초공사에서 일하던 중 1920년 펑톈(奉天)지점으로 전근 갔으나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철혈단(鐵血團, 의열단)에 가담하였다.

 

단장 김원봉으로부터 일본기관의 파괴, 요인 암살이 곧 조국독립의 첩경이라는 설명을 듣고,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고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할 것을 결심하였다. 폭탄과 권총을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 1921년 9월 12일 건물수리공을 가장하여 조선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비서실에 폭탄을 던진 후 다시 베이징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암살은 실패하였다.

 

이듬해인 1922년 3월 28일 중국 시찰차 들어오는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암살하고자 상하이 세관 부두에서 오성륜·이종암(李鍾岩) 등과 함께 권총으로 사격하고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하여 체포되었다(오성륜은 4월 1일 탈옥함).

 

일본 나가사키로 호송되어 공소원(控訴院)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이후 20년 징역으로 다시 감형되어 1943년 출소, 귀국하였으나 또다시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음으로 또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95년에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에 김익상의사 의거 터 표석이 설치되었다. <위키백과에서>

 

 

 

김익상 또 다른 이야기.

 

11월 공소원에서 사형이 확정될 때에는 의자를 들어 재판장 이삼을 공격하며 「저놈들이 나를 죽일 수는 있지만 내 뒤에는 또 수많은 내가 있다. 일본은 반드시 망하고, 조선은 반드시 독립한다.」 말을 하고 만세 삼창을 외칩니다.


그는 사형 선고에 추호의 미련도 없이 상고를 포기하고 사형이 확정된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다시 20년 징역으로 감형되어 21년의 오랜 옥고를 치룹니다. 청년이었던 28세의 나이로 의거 후 20여 년이 지나 노년에 접어든 50세의 나이에 석방되어 귀향한 선생.


당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도발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대거 탄압하는 일제는 의사의 귀향 후 얼마 안 있어 그를 연행해 갑니다.

일본인 고등경찰이 연행해 간 것으로 알려진 후 의사는 종적이 묘연해집니다. 단지 암살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입니다. <네이버 포스트에서>

 

 

의열단이 이루고자 하였던 독립 항거가 밀정들로 실패

 

 

 

 

 

황민. 본명 김승곤. 1938년 10월 10일 임시수도 한구<漢口>에서 조선의용대 창설 참여. 대원은 200여 명. 조선의용대 제1구대 대원으로 활동.

강점 뒤 의용대가 중과 함께 독립군으로서 국제정규전에 처음으로 참여함. <약산 김원봉 평전에서> 

 

 

 

의열단원. 두 번째줄 가운데 양족으로 검은 옷 입은 사람의 사이에 있는 이가 김원봉. 

 

 

김원봉 <앞줄 가운데> 

 

 

 

 

 

 

 

 

밀정 김호<본이름 김재영>

 

 

 

 

 

 

 

 

 

 

 

 

 

 

 

 

 

상해에 의열단 본부가 있엇다.

 

 

위의 글에 이어서, 동지의 정보를 가지고 일생의 편안함을 누리고 싶어했다.

 

 

 

홍범도 장군

 

 

홍범도 장군

 

 

 

홍범도(洪範圖, 1868년 10월 12일(음력 8월 27일) ~ 1943년 10월 25일)

 

조선 말기의 의병장이며, 일제 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가, 군인이다.

 

사냥꾼으로 활동하여 사격술에 능하였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에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이끌었다.

평안도 평양에서 출생하였고 한때 평안도 자성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평안도 양덕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이후 머슴, 건설 현장 노동자, 종이 공장 노동자, 사냥꾼, 광산 노동자 등을 전전하였다.

1895년경부터 의병에 뛰어들어 함경북도 갑산, 무산 등지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07년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에 자극을 받아 11월 갑산에서 산포대를 조직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삼수·갑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치다 만주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10년 한일 병합<국권 침탈> 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으며, 1919년 간도 국민회의 대한 독립군 사령관이 되어 국내로 들어와서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후에 독립군의 통합운동을 벌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여 김좌진과 함께 부총재가 되었다.

1920년 일본군이 봉오동을 공격해 오자, 3일간의 봉오동 전투에서 120명을 사살하고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청산리 전투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1927년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주당했고, 그곳에서 집단 농장을 운영하였다.

 

1943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향년 76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때 그의 직업은 극장 문지기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가족
아버지 : 홍윤식

어머니: 홍범도 출산 휴유증으로 죽음.
부인: 이옥구 ( ~ 1908년) 일제의 고문으로 순국
부인: 이인복 (1926년 러시아에서 재혼)
장남: 홍양순 ( ~ 1908년) 정평배기 전투에서 아버지 홍범도 장군과 함께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
차남: 홍용환 (일본군에게 고문당한 후 순국)

<위키 백과에서>

 

 

 

간도참변

 

간도참변(間島慘變) 또는 경신참변(庚申慘變)

1920년 일제는 만주의 관동군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병력까지 합류시킨 대규모 정규군을 간도로 보내,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그 지방에 살고 있던 무고한 한국인을 대량으로 학살하였다. 경신참변 또는 경신간도학살사건이라고도 한다. 3.1운동을 계기로 만주에서는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독립군 양성기관이 설립되고 무장한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었다. 이들은 국경을 여러 번 넘어 국내로 진공하여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을 크게 타격하였다. 일제는 위협 반 회유 반으로 만주의 중국 군벌까지 그들 편으로 끌어들여 합동으로 독립군 토벌작전을 벌였다. 그러나 만주 거주 조선 민중의 은밀한 저항과 중국 군대의 비협조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일제는 정규군 대부대를 만주에 직접 투입하여 독립군을 일거에 소탕할 계획하고 일본군의 만주 출병을 정당화할 사건을 조작할 음모하였다. 1920년 10월 일제는 중국 마적(馬賊)을 사주하여 혼춘현[琿春縣] 일본 영사관을 고의로 습격하게 하고 이를 빌미로 일본군을 대거 만주로 출병시켰다. 즉, 일본군은 중국 마적 두목 창장하오[長江好]라와 내통해 훈춘 공격을 사주하여 그해 10월 2일 마적 400여 명이 훈춘성을 공격하였다. 마적단은 약속대로 오전 9시부터 4시간 살인과 약탈을 자행, 중국인 70여 명, 조선인 7명, 일본인 수 명을 살해하고 비어 있던 일본공사관을 불질렀다. 일본군은 이 사건을 구실로 3개 사단을 출동시켰다.

 

그러나 독립군이 사전에 일본군이 공격해 오기 힘든 산중이나 중·소 국경 지대로 이동하여 일본군의 독립군 섬멸 계획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특히 독립군을 추격하던 일본군은 봉오동전투에서 오히려 독립군에게 패하자 이에 보복으로 조선인을 무차별로 학살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3개월에서 4개월에 걸쳐 수많은 조선인 마을을 불태우고 재산과 식량을 약탈하였으며, 조선인들을 보는 대로 학살하였다. 옌지현[延吉縣] 이란거우[依蘭溝]에서는 전 주민 30여 호가 살해되고 마을 전체가 폐허로 변하였다.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간 간도 일대에서 학살된 조선인들은 현재 확인된 수만 해도 3,469명에 이른다. 그 외 확인되지 않은 수효와 3개월에서 4개월에 걸쳐 학살된 수효를 합하면, 추정하건대 피해한 조선인은 적어도 수만 명에 이르고 일본은 노령 연해주에 살던 조선인들에게도 똑같은 만행을 자행하였다. <위키백과에서>

 

*봉도동 청산리 승전 뒤 홍범도 장군 등과 러시아 자유시로 갔던 김좌진 장군은 만주로 되돌아와 민심을 얻기 위해 방앗간 등을 운영하며 공산주의자들을 뺀 아나키스트도 받아들이면서 지도자로 활동했지만 오래 못하고 1930년에 피살됐다.

<자세한 것은 아래 '자유시 참변' 참고>

 

 

 

자유시 참변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은 1921년 6월 28일 러시아 스보보드니(알렉세예프스크, 자유시)에서 러시아 적색군(赤色軍, 적군)이 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을 포위, 사살한 사건이다. 다른 말로 자유시 사변(自由市事變),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도 불린다.

 

시대 배경

니콜라옙스크 사건 사건으로 불타서 내려앉은 일본영사관의 불탄 자리 1920년 6월
당시 러시아는 러시아 내전 중이어서 시베리아에서는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한 붉은 군대(赤軍)와 반혁명파를 중심으로 한 하얀 군대(白軍)가 대립하고 있었다.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 외국군의 무력간섭이 겹치면서 연해주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하얀 군대를 지원하고 있었다. 하얀 군대를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1918년 4월에 일본은 시베리아로 출병했고 하얀 군대를 지원하면서 반일 독립무장투쟁을 하는 한인무장대를 소탕하고자 했다.

이에 독립군은 적군파(赤軍派)에 가담했다. 1920년 3월 12일에는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독립군과 붉은 군대는 일본군과 하얀 군대를 전멸시켰다. 일본군은 1920년 4월 4~5일 야간에 블라디보스토크의 모든 볼셰비키 기관 및 신한촌을 비롯한 한인 밀집지대를 습격했다. 이 사건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볼셰비키 기관과 붉은 군대가 북방으로 후퇴함에 따라 연해주의 한인의병대도 행동을 같이했다.

이 한인의병대는 일반적으로 이만군대, 다반군대 등이 대표적인 무력군으로, 이만군대 사령관은 김표돌, 부사령관 박개서, 김덕보였고, 다반군대 사령관은 최니콜라이였다. 이들 연해주의 한인무장대들은 임시흑룡주정부가 극동공화국으로 강화되고 볼셰비키 세력이 강화됨에 따라 자유시로 집결했다.

 

대한독립군단의 조직

1920년 니콜라옙스크 사건,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본군이 독립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단행하면서 간도 참변을 일으켰다. 따라서 독립군들은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동 중 일단 밀산에서 독립군을 통합 및 재편성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군단에 통합된 조직은 다음과 같다.

북로군정서 (서일, 김좌진)
서로군정서 (지청천)
대한독립군 (홍범도)
대한국민회 (구춘선, 이명순)
대한신민단 (김규면) : 대한독립군단 결성 집회에 대한신민회 대표로 김성배(金聖培)를 파견했으나 성과 거두지 못함.
의군부 (이범윤) + 군비단 (의군부 잔여부대, 김홍일)
광복단 (이범윤) : 단장 이범윤은 상징적 인물이었으며, 중부대판(中部大辦)의 직함을 가졌던 김성륜이 실제 책임을 맡았다.
혈성단 (김국초)
도독부 (최진동)
야단 (아소래)
대한정의군정사 (이규)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는 서일이었고 부총재 홍범도·김좌진·조성환이었으며, 총사령관에 김규식, 참모총장에 이장녕이 추대되었다. 여단장에 이청천(지청천), 중대장에 김창완·조동식·오광선 등이 선임되었다. 휘하에 1개 여단을 두고, 그 아래에 3개 대대 9개 중대 27개 소대가 편성되어 있었으며, 총병력은 3,500여 명이었다.

밀산에서 겨울을 난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3월 부대별로 이동을 시작하여 노령 연해주와 흑룡강일대에서 활동 중이던 문창범, 한창해 등의 도움을 받아 만주-소련국경 하천인 우수리강을 넘어 안전지대인 연해주 이만(Iman, 달네레첸스크)에 집결하였다. 당시 연해주에 있던 대한국민의회의 문창범과 자유대대의 오하묵 등은 자유시에 군대주둔지를 마련하여 독립군을 집결하도록 권하였다.

이에 1921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에 걸쳐 독립군들은 자유시에 집결했다. 간도지역의 독립부대인 최진동 등의 총군부, 안무 등의 국민회군, 홍범도 등의 독립군, 서일 등의 군정서가 있었으며, 러시아 지역의 의병대로는 김표돌의 이만군, 최니콜라이의 다반군, 임표와 고명수의 이항군, 자유대대, 박그리골리의 독립단군 등이 있었다. 자유시 집결의 궁극적 목적은, 분산돼 있던 독립군 부대들이 힘을 합쳐 단일한 조직 아래 대일항전을 전개하려는 것이었고, 적군(赤軍)을 도와 일본군을 몰아냄으로써 자치주를 보장받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중 이만 시로 들어간 이청천 부대는 홍범도의 소개로 소련 적계군 한인부대장인 박일리아 연대장을 알게 되고, 박일리아는 소련 교관을 한국독립군부대에 배치하여 전술법을 교육하는 등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통수권 갈등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독립군대 중 오하묵의 자유대대와 박일리야의 이항군 사이에 독립군통수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났다. 오하묵측(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노령의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했고, 박일리야측(상해파 고려공산당)은 상해 임시정부를 지지했다. 이항군을 이끌었던 박일리아는 군통수권 장악을 위해 극동공화국 원동부(遠東部) 내의 한인부를 찾아가 이항군대는 자유대대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한다고 통고했다. 당시 극동공화국 한인부에는 상해파의 이동휘계 인물인 박애와 장도정 등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대한국민의회 및 자유대대측과의 협의도 없이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박창은을 총사령관, 그리고리예프를 참모부장으로 지정하여 자유시로 보내는 동시에 이항군대를 사할린의용대로 개칭하고 그 관할하에 자유시에 집결한 모든 한인무력을 두도록 했다.

하지만 1921년 2월 중순 자유시에 도착한 박창은 일행은 총사령관으로서의 지휘권을 행사하려 하다가 실패하고 총사령관직을 사임했고, 한인부는 그리고리예프를 연대장, 박일리아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두 사람은 즉시 군대관리에 착수하고 자유대대에 편입되었던 종래의 이항군대와 다반군대를 마사노프로 이주시키고 간도군대에 대해서도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자유대대는 끝까지 불응하여 장교들이 체포되었고, 무기들을 압수당하는 한편 이항군대와 다반군대에 의해 무장해제되고 지방수비대로 강제로 편입되었다.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독립군들에 대한 군권이 일단 상해파를 지지하는 이항군의 승리로 돌아가자 자유대대의 오하묵, 최고려 등도 이르쿠츠크에 있던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 동양비서부에 가서 독립군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했다. 이를 받아들인 동양비서부는 임시고려군정의회(임시군정의회)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 부사령관은 오하묵, 군정위원은 김하석, 채성룡으로 임명하였다.

박일리아 등은 한인군사위원회(전한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위원회의 합법성을 주장하면서 극동공화국정부와 교섭했으나 실패하였다. 1921년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한 칼란다리시빌리는 7일 자유시의 전부대를 소집하여 자신이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임을 선포하고, 8일 박일리아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박일리아는 이를 거부하였지만 홍범도와 안무의 군대는 자유시로 돌아갔다. 박일리아는 고려혁명군정의회에 대해 계속 반항했다.

그러나 1921년 6월 27일 오후 11시 사할린 의용대의 연대장 그리고리예프도 칼란다리시빌리에 투항하자, 칼란다리시빌리는 사할린의용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사할린의용대에 접근했고, 이후 제29연대 대장은 사할린의용대 본부에 들어가 복종할 것을 종용했다. 사할린의용대는 무장해제 명령에 불응했고, 자유시수비대 29연대는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독립군들이 목숨을 잃었고, 전투 끝에 무장해제를 당한 사할린의용대는 전사자와 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교전 당시의 병력은 1,000여 명가량이었다. 자유시참변(흑하사변) 뒤 자유시에 남아있던 병력은 붉은 군대 소속으로 편입되어 이르쿠츠크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후
자유시사변은 외부적으로 사할린의용군이 볼셰비키군의 포위와 집중공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간의 대립투쟁이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전투 끝에 전사자, 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되었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던 서일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많은 독립군이 사망하자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 두 달후 밀산에서 스스로 자결했다.
당시 이범석, 김홍일 등 일부 독립군은 러시아 이만으로 가지 않고 만주에 남아 있었고, 김좌진은 이만까지 갔다가 생각한 바 있어 만주로 되돌아와 흩어진 독립군을 모아 대기하였다.

지청천은 자유시에서 자유시 참변을 겪은 이후 이르쿠츠크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오하묵 등과 함께 고려혁명군(1921.8)을 결성하고. 같은 해 10월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4월경 학교 교육방침과 소련 당국의 규정이 대립되어 체포되었으나 7월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지청천은 석방되었다.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 대부분은 이르쿠츠크파 및 상해파 공산당에 등을 돌렸다.

특히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는 이동휘가 가담하고 있는 적기단도 적대시하였다.

 

연표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 멸망, 러시아 내전발생
1918년 11월 11일 - 독일의 항복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남
일본 군이 하얀군대를 돕기 위해 시베리아에 출동했지만 붉은 군대와 싸우던 미국과 체코슬로바키아, 그 외의 연합군이 철수함
일본 국회가 러시아에서 일본 군도 철수하기로 결의
1919년 3월 1일 - 3·1 운동 발생
1920년 3월 - 니콜라옙스크 사건
러시아에서 철수하는 일본군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만주에 있는 조선 항일 무력단체들을 토벌하기로 함
일본군 19사단은 북간도의 북로군정서군을 공격.
1920년 6월 - 봉오동 전투 발생. 최진동장군이 이끄는 북로독군부가 중국 지린성 허룽현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과 싸워 크게 이김.
1920년 10월 21일 - 최진동장군, 김좌진 장군,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함께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침.
일본군 21사단은 남쪽의 서로군정서군을 공격.
연이어 대패한 일본군은 만주에 있는 한국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 개시.
일본군의 대대적 토벌로 인해 독립군은 전략상 노령(露領)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이동중 밀산(密山)에서 독립군을 통합 재편성하여 새로운 대한독립군단을 탄생시킴. 병력은 약 3,500명 정도.
대한독립군단이 러시아 연해주 자유시로 진입. 분산된 모든 독립군들을 자유시로 불러모음.
수많은 부대가 총집결한 대한독립군단 내부에 군권장악과 관련 권력투쟁이 발생함.
1921년 6월 27일 - 붉은 군대가 대한독립군단의 소수파인 공산주의자 와 함께 대한독립군단을 공격함. 자유시 참변 발생. 분산되었던 조선의 독립군들이 모두 모여서 3500명의 대규모 부대를 이루어 놓은 것을 적군(赤軍)에 의해 사살, 부상당하거나 수용소로 끌려감. 탈출한 사람은 드물었고, 연해주 지방의 조선독립군 세력은 모두 와해됨.

<위키백과애서>

 

 

 

경남 밀양 의열기념관

 

 

하동 독립유공 서훈자 명단 <52명>

밀정 김재영<김호> 이름이 버젓이.

 

 

 

 

<나온 곳. 2019. 8. 20일. 한국방송공사. 티비 화면>

 

 

*밀정. 지금은 토착 왜구<조선 시대엔 토구>란 이름으로 이 대명천지에 아예 대놓고 거리를 휘젓고 돌아다니며 매국노 질을 하고 있습니다. 낙성대경제연구소<1987년 안병직 이대근 공동 설립> 이영훈, 김낙년, 이우연 등이 펴낸 '반일 종족주의'. 올해<2019년> 7월 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왜의 극우단체가 주최한 유엔 인권 위원회와 왜 방송 등에 나가서 식민지 지배 미화, 식민지 근대화론, 한국인 비하, 강제 징용자, 강제 성노예 할머니들에 대한 왜곡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위의 독립신문에도 나와 있듯이 이들은 칠가살<죽여도 되는 일곱 가지 인간> 가운데 세 번째인 '일제 앞잡이'에 해당하지 않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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