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통영 13 <한산섬 제승당>

아리1 2018. 8. 11. 14:06

2018. 6. 5일. 화. 제승당.

 

 

 

이 글을 쓰면서 이번처럼 많은 짬이 들어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바닷가를 따라 걸으면서 그때의 전쟁상을 생각하면 나라의 운명을 건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또한 정유재란 당시 원균이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그 앞까지는 한 번도 뚫리지 않았던 전라도마저 뚫렸으니. 그만큼 최고 권력자의 국정 운영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7년 동안의 전쟁에서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19시 20분 서울로.

 

 

 

 

15시 40분                                                                                    제승당 가는 길

 

 

 

 

 

 

우물

 

 

 

 

 

 

대첩문

 

 

 

 

 

 

 

 

 

충무문

 

 

 

 

최초 삼도수군통제영 제승당 배치도

 

1.충무사 2.내삼문 3.유허비 4.외삼문 5.홍살문 한글비 6.제승당 7.한산정 8.과녁 9.수루 10.후손 공덕비 11.충무문

 

 

 

 

 

 한산대첩도는 제승당 안과 여기처럼 경내에도 있믐. 교통 알림미처럼 밑에서 위로 갈수록 멀리 떨어져 있음.

 

 

 

 

활터인 한산정은 제승당<옛 운주당> 바로 뒤에 있음. 오른쪽 살짝 보이는 집이 제승당.

 

 

 

 

                                                                                     제승당

 

 

 

 

 

제승당

 

<충무문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집. 네 기둥에 쓰인 글씨는 아래 '한산야음도'에 나오는 시입니다. 앞에서 보기에 오른쪽부터>

 

이순신이 ‘삼도 수군통제사’의 직위를 받고 한산도에 본영을 설치했을 때 그는 지금의 제승당 자리에 운주당<運籌堂. 운주는 지혜로 계책을 세운다. 운주당이란 이름은 이순신이 가는 곳마다 기거하던 곳을 편의상 부르고 있는 곳>을 세웠다. 이순신은 운주당에서 밤낮으로 거처하면서 여러 장수들과 작전계획을 세우고, 전쟁에 관하여 의논했으며, 한편에서 계급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이번 왜란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병사가 있으면 찾아와서 말하게 함으로써 제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렇게 운주당은 이순신이 한산도에 진을 친 이후 기거하면서 휘하 참모들과 작전계획을 협의했던 집무실이었다.

 

1593년 7월 15일부터 1597년 음력 2월 26일까지 근 3년 8개월 동안 이곳을 삼도 수군의 중심 진영으로 삼아 해상세력을 장악하고 나라의 어려움을 극복한 역사의 현장이다. 이곳에서 왜군을 물리치기 위한 작전을 수립했고, 총통과 같은 신식 무기를 제작하여 보급하는 등 군무를 관장했다.

 

그러던 운주당은 1597년 2월 26일 이순신 장군이 파직 한양으로 붙잡혀 감으로써 폐진 되었다. 임진왜란 중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1597년 1월 가토 기요마사가 다시 조선을 침략한다는 정보를 접한 선조는 가토를 바다에서 공격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거짓 정보라고 판단한 이순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선조는 이순신이 어명에 불복했다 하여 체포 한양으로 압송 하옥하고 그 후임으로 원균을 임명했다. 그러나 1597년<선조 30년> 7월 15일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수많은 병사와 전함을 잃 참패를 했다. 거북선과 판옥선 등 160여 척의 전함이 격침 또는 소실되고 1만여 명의 병사가 숨진 임진왜란·정유재란 통틀어 조선 수군의 유일한 패전이자 최대의 패전으로 기록되었다.

 

이때에 12척의 배와 함께 도주했던 배설은 한산도로 돌아와 군사 시설 및 양곡·군기와 군용 자재를 불태우고 남아 있던 백성들을 피난시켰다. 7월 16일 이곳으로 몰려온 왜군은 한산도를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남해안의 바닷길은 통제영을 점령한 왜군이 다시 장악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42년 뒤인 1739년 영조 15년 107대 통제사 조경이 중건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인 1740년 운주당 터에 지금의 건물을 복원하면서 유허비를 세우고 제승당(制勝堂)이라고 이름 지었다. <아래 제승당 표지판 및 다음 백과에서> 

 

1895년<고종 32년>에는 각 도의 병영과 수영이 해체되었다. 통제영이 해체되고 뒤이어 주권을 왜에 빼앗기게 되자 지방 유림이 나서서 제승당을 관리했으나 재원 조달이 어려워 점점 퇴락하여 가고 있었다. 이에 통영 군민들은 제승당의 퇴락을 두고 볼 수 없다 하여 1932년 3월 15일 ‘한산도 제승당 중건기성회’를 창립하고 모금 운동을 벌이는 한편, 한산도 주민들은 별도로 ‘모충계’를 결성하여 ‘충무 영당’ 건립과 충무공 영정 봉안을 추진하여 1933년 6월 2일 ‘한산도 제승당 준공식’과 ‘충무공 영정 봉안식’을 동시에 거행했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이루어졌다. 경내에는 충무사, 제승당, 수루, 한산정을 비롯하여 유허비 2기, 한글 유허비 1기, 통제사 송덕비 7기, 비각 5동과 5개 문<내삼문, 외삼문, 홍살문, 충무문, 대첩문> 기타 부속 건물이 있다.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은 1959년 사적으로 지정.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3호로 지정되었다. <다음 백과에서. 다음 백과의 같은 쪽에서도 이렇게 다른 소리를 하고 있으니> 

 

1597년 8월 정유재란 당시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 뒤 고성 쪽으로 도망가다가 그의 아들과 함께 왜군에 살해되었다. 원균과 같이 행동하다 겨우 살아 나온 선전관 김식에게서 패전 보고를 듣고 크게 놀란 선조는 백의종군(白衣從軍)하고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해 수군을 수습하게 하였다.

 

한편 배설은 1597년 신병을 치료하겠다고 허가를 받은 뒤 또다시 도망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전국에 체포 명령을 내렸으나 종적을 찾지 못하다가 1599년 선산에서 권율(權慄)에게 붙잡혀 한양에서 참형되고 아버지와 아들 배상충(裵尙忠) 등은 모두 방면되었다. 그 뒤 쌓은 무공이 인정되어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다음 백과에서>

 

 

*1895년<고종 32년>에 각 도의 병영과 수영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해체되었으통제영은 충무공을 모시는 공식 사당으로 인정받아 계속 운영됨.

 

*아래 제승당 글에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자는 원균이나 그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음.

 

*통영 충렬사 보물급 고문서 ‘심원록’ 발견. 심원록은 통영 충렬사의 경우,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게 제례를 올리거나 참배하기 위해 방문한 사람들의 명부. 영조 19년 6월(1743년)부터 단기 4313년(1980년)까지 238년 동안의 방대한 기록이 16권의 책으로 묶여 있다. 조선시대는 물론 대한제국, 일제 식민지, 대한민국에 이르는 기록이다.

동아대학교 이훈상 교수는 “영조대부터 오늘날까지 200년 이상 기록이 이어져온 곳은 이번에 확인된 통영 충렬사가 유일하다”라고 평했다. <2018. 9. 7일. 한려투데이에서>  

 

 

 

 

 

  제승당 현판

 

지금 제승당 처마 밑에 걸려있는 현판의 "제승당" 글씨는 제107대 통제사 조경의 친필이고, 안에 보관된 대형 현판은 제140대 통제사 김영수의 친필임. 현판 규격은 가로 3.8m, 세로 1.9m <아래 글에서> 가로 세로 비가 2 : 1 구조로 이렇게 큰 현판은 우리나라 어디에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런데 글씨에 크고 작은 금들이 있는데 수으로 난 금은 여러 개의 판을 이어 붙이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으나 그 밖의 빗금이나 굽은 금은 세월 때문인지 아니면 누군가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인지 아쉬움이 남는다. 

 

 

 

 

                                                                                        현자총통

 

보물 제885호. 이 총통은 청동으로 제작된 것으로, 1984년 6월 8일 경상남도 거제군 신현면 고현리 고현만 앞바다에서 인양되었다. 전체 길이 78.5㎝, 구경 7.5㎝, 외경 12.5㎝이며, 손잡이는 1개<여기 있는 것은 2개. 밝혀야 할 일>가 부착되어 있다. 발사물로는 주로 차대전(次大箭)과 철환(鐵丸: 철제 둥근 탄환)을 사용하였다. 오랫동안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었지만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약실에 새겨진 “만력병신칠월(萬曆丙申七月)”의 간기가 있어 1596년(선조 29)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작 시기로 보아 정유재란 때 조선 수군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짜는>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시대 총통은 규모에 따라 천자(天字)·지자(地字)·현자(玄字)·황자(黃字) 총통으로 나뉘고, 그 중 세 번째에 해당하는 현자총통은 유통식 화기(火器)로 조선 태종 때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널리 사용된 전형적인 중화기(重火器)이다. <다음 백과에서> 

 

*제승당에 보관되어 있는 이 총통과 진주박물관에 있는 총통이 같은 규모의 총통인지 알 수도 없다. 아래에 알림 글이 있긴 하나 너무 작고 흐릿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다음 백과'의 글을 옮기게 되었다.

 

 

 

 

한산대첩도

임진왜란 때 이충무공께서 적선 73척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 전법으로 그 가운데 12척을 나포하고 47척을 섬멸하신

대승첩 장면이다. <아래에서>

 

 

 

 

산대첩

 

 

 

한산대첩 상황도

 

1592년 7월 8일. 한산도 해전; 왜선 47척 격침, 12척 나포. 10일 안골포 해전; 왜선 20척 불태움. 이 두 해전을 한산대첩이라 함.

거북선은 임란 초기 3척, 1596년 그 뒤 5척 정도. <아래에서>

 

 

 

 

 

한산대첩도

 

여기의 한산대첩도는 제승당 안이 아닌 경내에 있는 것 임. 왼쪽 첫 번째 상황은 왜가 견내량<지금의 거제대교 일대>에 집결해 있고 우리는 그곳이 비좁은 곳이라 보다 넓은 한산도 부근으로 유인하는 모습이고 본진은 미륵도<통영시. 지금은 충무, 통영대교와 연결되어 있음>와 한산섬 사이에서 대기하고 있음. 가운데 장면은 그야말로 학익진 전술<아래 학익진 전법 참고>. 마지막은 마치 큰 그물 안으로 들어온 물고기를 들어 올리는 일만 남은 장면이라 할까. 물 반 왜군 반(?)

 

 

 

 

학익진 전

 

처음에는 1자 진. 이 전법은 중앙 부대 즉 거북선이 맨 앞에 가고 그 양쪽으로 판옥선이 뒤따른다. 

그러다가 적선이 공격해 오면 좌우에 있던 판옥선이 앞으로 나아가 적군을 포위 공격함.

이 전법은 육지에서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들이 행하는 진형의 하나이지만

이순신 장군은 바다에서 이 진법을 씀. <아래에서>

 

 

 

 

 

노량해전도

 

정유재란 때인 1598년<선조 31> 11월 18일부터 19일 이틀 사이에 이순신(李舜臣)과 진린(陳璘)이 이끄는 조·명 연합함대가 노량<경상남도 남해도와 하동 사이의 해협. 지금의 남해대교 부근> 앞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

 

임진왜란 최후의 대규모 해전으로 이순신이 전사한 마지막 싸움이었다.

 

1597년 8월 명량해전에서 크게 패배한 왜는 1598년 11월 왜장 고니시 등이 이끄는 500여<아래 노량해전도에는 300여 척으로 나옴> 척의 왜선이 노량해협에서 공격해 왔다. 200여 척의 배밖에 보유하지 못했던 이 전투에서 200여 척의 왜 수군이 격파되고 패잔선 50여 척만이 관음포 방면으로 달아났다. 명량해전<울돌목. 전라남도 진도군과 해남군 사이의 바다. 진도대교 부근. 1597년 왜 수군이 133척의 배를 이끌고 조선에 침입할 때, 이순신 장군이 명량의 거센 조류를 이용하여 격퇴한 전투. 당시 조선의 전력은 원균의 패전으로 12척의 병선밖에 남지 않았으나 이순신은 뛰어난 전술로 적에 대항했고, 왜장 구루시마의 목을 베어 사기를 꺾으면서 왜 병선 31척을 격파했다. 이 전쟁은 모함을 받아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가 되어 승리를 이끈 해전이며, 정유재란의 흐름을 바꾸게 되었다.>

 

1598년 8월 풍신수길이 죽자 왜군은 순천 등지로 집결하면서 철수작전을 서둘렀다. 이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도독(水軍都督) 진린과 함께 1598년 9월 고금도(古今島;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 해안선 길이 54.5km, 면적은 40.1km2. 고려시대부터 거주하기 시작함. 예로부터 군자가 많이 살았다 하여 고금도라 하였다 함.) 수군 진영을 떠나 노량 근해에 이르렀다. 명나라 육군장 유정(劉綎)과 수륙합동 작전을 펴 왜교(倭橋)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 고니시(小西行長)의 부대를 섬멸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고니시는 수륙 양면으로 위협을 받게 되자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진린은 고니시가 마지막으로 요청한 통신선 1척을 빠져나가게 하고, 이순신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고니시는 통신선으로 사천(泗川) 등지의 시마쓰(島津義弘)와 연락해 남해·부산 등지에 있는 왜 수군의 구원을 받아 조·명 연합 수군을 협공하면서 퇴각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러한 고니시의 전략을 잘 알고 있는 이순신은 진린을 꾸짖고 함께 진형을 재정비해 왜군을 맞아 격멸하기로 하였다

 

11월 18일 밤 이순신의 예견대로 노량 수로와 왜교 등지에는 500여 척의 왜선이 집결해 협공할 위세를 보였다. 200여 척의 조·명 연합 수군을 거느린 이순신은 “이 원수만 무찌른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此讎若除死則無憾)”고 하늘에 빌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19일 새벽, 싸움은 막바지에 이르고 이순신과 진린 모두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으나 서로 구원해 가며 전투를 독려, 왜의 수군 선박 200여 척이 불에 타 침몰하거나 파손되고 100여 척이 이순신 함대에 나포되었으며 나머지 패잔선들은 관음포 쪽으로 겨우 달아났다.

 

이순신은 같은 날 오전 관음포(觀音浦)로 도주하는 마지막 왜군을 추격하던 중 총환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는 세계 사상 길이 빛나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다음 백과에서>

 

오른쪽 액자. 이순신 장군이 부하들에게 남긴 말. 필사즉생 필생즉사 <必死卽生 必生卽死>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이충무공의 전사에 대해 여러 말들이 있는데 만약에 살아서 돌아왔더라면 과연 어떠한 일이 벌어졌을까. 생각해 볼 일이다.

 

 

 

 

아래의 '노량 해전도'에서는 노량에서 왜선 300척<다음 백과에서는 500여 척으로 나옴>과 싸워 많은 적선을 쳐부순 뒤 적의 유탄을 맞고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54세로 장렬히 순국하셨다. 

 

 

 

 

 

노량해전도


정유재란 때인 1598년<선조 31> 11월 18일<음력>부터 19일 이틀 사이에 이순신과 진린이 이끄는 조, 명 연합함대가 노량 앞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 <글, 아래 해전도 모두. 다음 백과에서>/ 11월 19일 새벽에 전사.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내가 우리나라 바닷가를 걸어서 지났기에, 당연히 아래에 나와 있는 곳도, 시대만 바뀌었을 뿐 마음만은 그 시대 그 상황에 있는 것 같다.

 

 

 

 

명조팔사품.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나 이것도 있었던 일이니

 

 

 

명조팔사품을 병풍으로도 꾸며놓음

 

 

 

통영 충렬사 팔사품 <忠烈祠 八賜品>

충렬사 팔사품(八賜品)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지원군으로 왔던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명나라 조정에 보고하자 신종(神宗) 황제가 이순신에게 보내 준 여덟 가지의 물품이다. 통영 통제영에 300여 년 동안 보관되어 오던 팔사품은 1895년(고종 32) 통제영이 해체되면서 이순신의 사당인 통영 충렬사로 옮겨져 봉안되었다. 아산 현충사 성역화 작업이 마무리된 1969년에 현충사로 옮겨졌으나 통영지역 주민들의 요청으로 다시 충렬사로 이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음 백과에서>

 

팔사품 그림

 

 

 

명나라 황제가 보낸 팔사품은 8종류의 물품 15점이다. 구체적으로는 도독인 · 호두령패 · 귀도 · 참도 · 독전기 · 홍소령기 · 남소령기 · 곡나팔 등 여덟 가지 군대용 의장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도독인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가지 유물은 각 2개씩이어서 전체 유물의 수는 총 15점이 된다. 팔사품은 1966년 3월 4일 보물 제440호로 지정되었다. 이순신이 생전에 사용한 유물은 아니지만 명나라에서 이순신을 높이 평가했음을 보여 주는 상징물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다. 팔사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도독인 1개
도독인(都督印)은 구리로 만든 길이 15.1cm, 폭 7.8cm, 높이 1.8cm의 손잡이가 달린 장방형의 동제(銅製) 도장이다. 도장의 함(函)은 뚜껑의 모를 죽인 방형이며 마름모꼴의 손잡이가 있다. 모서리마다 놋쇠장식을 두르고 앞면에 함에는 ‘황조어사인’이라 쓰여 있다.

 

도독인

 

 

2. 호두령패 2개
호두령패(虎頭領牌)는 길이 31.8cm. 너비 30.3㎝. 팔각형 형태로 생긴 나무패로 군령을 전달할 때 사용하는 것이다. 한쪽에는 검은 칠을 하고 ‘영(令)’ 자를 새긴 다음 붉은색으로 메웠고, 다른 쪽에는 분칠을 하고 ‘대장(大將)’ 두 글자를 썼다. 이 목패가 들어 있는 녹비[鹿皮] 주머니에는 표범의 머리를 그려 장식하였으며 역시 녹비로 끈을 만들어 달았다.

 

호두령패

 

 

3. 귀도 1쌍
귀도(鬼刀)는 전체 길이 137.9cm, 칼날 길이 83.3cm, 너비 7cm의 의장용 칼이다. 박달나무로 만든 칼자루에는 용두(龍頭)를, 그 아래에는 귀두(鬼頭)를 조각하고 모두 붉은 칠을 하였다. 용두에는 비늘이 표현되었다. 칼집은 오동나무로 만들고 종이로 싸서 붉은 칠을 한 다음 용의 비늘을 채색하여 그렸다.

 

귀도

 

 

4. 참도 2자루
참도(斬刀)는 길이 180.2cm, 너비 6cm의 칼이다. 칼자루는 나무로 만들었으며 상어 껍질로 다시 싸고 붉은 칠을 하였다. 칼집 역시 목제인데 쇠가죽으로 싼 뒤 붉은 칠을 하고 은도금한 쇠로 장식하였다.

 

참도

 

 

5. 독전기(督戰旗) 2폭(幅)
가로 16㎝, 세로 63㎝, 깃대 길이 178㎝.독전기는 전쟁터에서 전투를 독려하기 위해 지휘관이 사용하는 깃발이다. 남색 비단 바탕 한가운데에 세로로 ‘범군임적불용명자처참(凡軍臨敵不用命者處斬)’, 즉 ‘군사가 적을 만났을 때 명령에 따르지 않은 자는 처단한다’는 문구가 쓰여 있다. 그 좌우에는 붉은 비단을 오려내어 독전(督戰) 두 자를 배접한 뒤 실로 꿰매었다. 깃대 머리에는 창(槍)이 꽂혀 있다.

 

 

*여기에서 독전기 바탕색을 잘못 적은 듯. 아래를 보면 남색 바탕이 아닌 붉은색 바탕에 남색 글자를 씀. 다른 여러 글을 봐도 모두 남색 바탕으로 표기. 어디를 보고 남색이라 하는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느 기록이 원본인지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원본의 잘못도 모른 채 갖다 베끼기에 바빴을 것으로 밖에.

 

 

6. 홍소령기(紅小令旗)와 남소령기(藍小令旗) 각각 2폭
둘다 군대의 명령을 전할 때 쓰는 깃발인데, 가로 각 62㎝, 세로 각 63㎝, 깃대 길이 각 177㎝, 180㎝. 같은 형식과 수법으로 제작된 두 쌍의 기이다. 다만 홍기는 붉은색의 비단 바탕에 남색 비단으로 ‘令(령)’자를 붙였고, 남기는 남색 바탕에 홍색의 ‘令(령)’자를 붙였다. 깃대 머리에는 창을 꽂았다. 홍소령기는 문관에게, 남소령기는 무관에게 영을 내리는 신호 깃발이다.

 

왼쪽부터 독전기. 남소령기. 홍소령기

             깃발                      

 

 

7. 곡나팔(曲喇叭) 2개
곡나팔은 구리로 만든 나팔로 목이 구부러진 모습이어서 곡나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길이 218.2㎝, 구경 25.7㎝. 전체 마디는 네 개이며 한가운데에 붉은 술이 드리워져 있다.

 

곡나팔

 

 

 

* 팔사품 반론. 2014년 11월 19일 오후 2시 장경희 한서대학교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통영시립박물관 세미나실에서 열린 '통영 충렬사 팔사품' 연구논문 발표회에서 "팔사품은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통제영에 남긴 것임을 밝혀냈다"고 발표했다. 

그는 "8종의 유물 중 5종은 본래의 것이고 3종은 후대에 새로 제작한 것"이라며 "본래의 것 5종과 양식적으로 분석한 결과 명 황실의 품격이나 공식적인 성격보다는 개인적이며 지방의 토착적인 특색이 강하게 반영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팔사품 중 가장 대표적인 도독인(도독을 상징하는 도장)의 경우 글자의 배열이 좌우 5글자씩 총 10글자이고 글자별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장 교수는 중국 구이저우성 안순시박물관에 소장된 관인을 충렬사 도독인과 비교했다. 안순시박물관 관인은 충렬사 도독인과 달리 9글자의 글씨가 3열 3행으로 돼 있고 글자의 분할도 명확하다.  

 

장 교수는 "명나라 황제가 명군에게 하사한 관인 유물을 볼 때 충렬사 도독인은 관방이나 관인이 아니라 사인(私印)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지적했다.

 

조선·명의 실록에 신종이 직접 내렸다는 내용이 없다. 팔사품이 명나라 황제의 하사품이 아니라는 주장은 지난 2012년 중국 류바오취안 산둥대 교수가 먼저 제기했다. <다음 뉴스에서>

 

 

한산정

 

이곳은 이충무공이 부하 장졸들과 함께 활쏘기를 연마하던 곳. 과녁까지는 약 145m. 활터와 과녁 사이에 바다가 있는 곳은 여기 뿐이다.

 

 

 

 

 

 

한산정<활터>. 기둥 사이로 과녁이 보임

 

 

 

과녁. 한산정과 과녁 사이는 바다임

 

 

 

수루

 

 

 

 

수루 현판

수루 안 현판 글은 한산섬 노래. 여기에서 한시 그대로 적었다면 '한산도 달 밝은 밤에...' 얼마나 어색하게 느껴질까요. 마찬가지로 수천 년 넘게 써오던 한자어를 우리말로 고쳐 쓰면 처음에는 어색하게 여겨질지 모르겠으나 자꾸 쓰다가 보면 오히려 한자어를 쓰는 게 더 어색해질 겁니다. 최현배 선생이 비행기를 날틀로 했다가 사대주의자들로부터 호된 공격으로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마 지금도 날틀이라 하면 미친 놈 소리 바로 날아올 것이다. 하나하나씩 우리말 우리글로 고쳐 나갑시다.   

 

                   

 

 

 

 

 

 

한산도가 <이 시는 위 '수루' 네 기둥에도 쓰여 있음. 오른쪽부터>

이 시를 지은 날이 1595년 8월 15일. 그로부터 315년이나 지난 1910년 8월 29일 그때보다 더한 나라를 통째로 그것도 다른 나라도 아닌 목숨을 바쳐 싸운 바로 그 왜에게 36년 동안이나 강점되었다가 벗어난 날. 이충무공의 정신 '멸사봉공, 창의와 개척, 유비무환' 시대상이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이충무공의 기본 정신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을 것이다. 가슴 깊이 새기고 늘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가는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한산도가

 

 

 

한산도야음. 수국추광모....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시구절이다. <이 시는 위 '제승당' 네 기둥에도 쓰여 있음. 오른쪽부터>

 

 

 

한산도야음<임란 기록 가운데 이순신의 난중일기, 류성룡의 징비록. 모두 어려운 상황에서 특히 난중일기는 전쟁 가운데서도 거의 빠짐없이 쓴 것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 중의 삼국지연의는 여러 번 읽었어도 난중일기는 읽지 못했다는 소리가 있는데 지금이라도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수루에서 본 한산대첩 기념비

 

 

 

제승당 한산정 수루를 거쳐 충무사로

 

 

 

홍살문 쪽이 충무사가 있는 곳. 오른쪽 문은 한산정으로 나가는 문

 

 

 

 

 

 

홍살문. 한글비. 외삼문

 

 

 

 

    한글비

 

홍살문 안 오른쪽. 1948년 광복을 기념하기 위해 경상도내 초. 중등학교 학생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비석이다.

 

 

 

한글비각

 

 

 

한글비석

 

 

 

비석 뒷면

 

 

 

앞면 같은 옆면 비각. 옆면에는 아무런 글이 없음

 

 

 

 

제승당 유허비

 

<유허비; 선현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유허비 

외삼문과 정면으로 보이는 내삼문 사이에 있는 비. 여기서는 왼쪽. 앞에서부터 조경이 세운 비. 녹색의 비문. 이규석 비. 마지막 조그맣게 작은 벽돌처럼 보이는 유물은 구비매처. 뜻은 옛 비석을 묻은 곳. 파란 동그라미 안.

왼쪽 비석은1739년에 제107대<1739-1741. 모든 통제사의 임기는 2년> 통제사 조경이 제승당을 새로 세운 것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오른쪽 비석은 이충무공의 후손으로 제198대 통제사를 지낸 이규석이 새로 세우면서 전에 있었던 비석을 묻은 곳이라는 표지석을 남김. 가운데 녹색으로 된 비석은 오른쪽 비석<이규석>의 뒷면을 한글로 풀어 새겨 놓은 것이다. <먼저 세위진 조경의 비각이 일부만 보여 아쉽게 생각한다.> 

오른쪽 표지판만 보이는 곳은 제승당 정화 기념비가 있는 곳.

 

 

 

 

조경의 비문

 

 

 

비석이 위에 나온 것처럼 무른 사암으로 되어 있어 아랫부분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제승당 유허비<1970년대 이규석 비 뒷면 글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기 쉽도록 한글로 옮겨 적음>

 

 

 

<위의 녹색 비문을 다시 알아보기 쉽게...>

어허 여기는 이 장군 순신의 제승당 터다. 바로 그가 이 집에 앉아 지휘하고 호령할 제 천지 귀신도 그 정성을 굽어보고 바람 구름 번개 비가 그의 응변 술책을 도와 왜적들이 바다에 깔려 날뛰면서도 이 집 밖에서만 웅성거리지 차마 감히 가까이 다가들지는 못했던 것이니 어찌 그리 장하시고 이제 다시 수백 년이 지나 주춧돌은 옮겨지고 우물과 부엌마저 메워졌건만 아득한 파도 너머 우거진 송백 속에 어부와 초동들은 아직도 손가락으로 제승당 옛터를 가리켜 주니 백성들은 이같이 오래도록 잊어버리지 못하나 보다. 슬프다. 옛날 주(周)나라 소공(召公)이 막을 잠깐 쳤던 자리라고 거기 나는 아가위 나무(甘棠) 한 가지도 베지 말라는 노래를 지어 읊조리거늘 사직을 바로잡고 우리 창생을 살리심이 그 누구 힘이관대 차마 이 터에 풀이 우거져 있게 할까 보냐. 세월이 흐르고 역사가 지나가 차츰 더 아득해지면 저 어부와 목동들마저 집터를 잊어버려 물어볼 곳조차 없어질는지 그 또한 누가 알리요. 그래서 이제 통제공(統制公) 조경(趙儆)이 흙을 쌓아 터를 돋우고 돌을 다듬어 비를 세우는 뜻은 실로 여기를 표해 두자는 때문이라. 어허 인제는 천하 만세에 여기가 이 장군 집터였던 줄을 알게 되리라 이제 군자 이르되 통제공 조경은 과연 능히 임금을 섬기는 분이라 하리니 그 어른(忠武公)을 사모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 비를 세울 것이며 진실로 사모하는지라 반드시 본받을 것이며 진실로 본받는지라. 반드시 충성되고 의로울 것이며 충성되고 의로운지라. 임금을 섬길 따름 다른 무엇이 있을까 보냐. 여기 비를 세우고 글씨를 쓴 이는 통제사 조경이요 글을 지은 사람은 도사(都事) 정기안(鄭基安)이다. <다음 백과에서>

 

 

 

이규석이 새로 세운 유허비

 

 

 

 

 

 

구비매처

제198대 통제사를 지낸 이규석이 유허비를 새로 다듬어 세우고 옛비는 그 옆에 묻어 두었는데 최근에 다시 발굴하여 2기를 함께 보존하고 있다.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정화사업

 

 

 

제승당 정화기념비

 

 

 

내삼문

 

 

 

 

충무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

 

 

 

 

충무공 영정

 

아랫부분에 기와지붕이 자리잡고 있음. 무슨 까닭이라도.

 

 

 

 

서간문

<이 글은 충무공께서 한산섬으로 수군 진영을 옯긴 다음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 답문이다. 아래 알림글에서>

 

*이순신 장군 부인 이름

충무공 이순신 장군 부인의 실명이 '방수진(方守震)'임이 국보 기록물을 통해 처음으로 확인됐다. 7일 전라남도 이순신 연구소에 따르면 현충사에 보존 중인 국보 76호 서간첩(書簡帖)에 이순신 장군의 선친과 부인의 실명이 함께 기록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서간첩은 이순신 장군이 영암에 사는 현건과 현덕승 등 연주 현씨 문중 지인에게 보낸 친필편지를 모아 엮은 기록물로,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연주 현씨 문중에서 200여년 간 보존됐던 서간첩은 충무공의 8대손이자 영암군수였던 이능권에게 발견돼 지금은 현충사에서 보존하고 있다. 

 

서간첩 상단에는 편지 내용, 서체와는 무관한 다른 형태로 충무공 가족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할아버지는 백록, 아버지는 정(), () 방수진(方守震)이라고 쓰여 있다. 이순신 연구소 관계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부인 방씨의 이름은 몇 개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확인된 적은 없었는데, 국가문서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라며 "누가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서간첩 원본에 적어둔 점으로 미뤄볼 때 '절대 잊지 말라'는 의미로 풀이된다"고 밝혔다. 

 

  서간첩 상단에 쓰인 이순신 장군 가족 이름 [전남 이순신 연구소 제공]

 

노기욱 전남 이순신 연구소장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소장한 국보 76호 서간첩 문서 이미지를 사용 허가를 받아 분석한 결과 이 같은 기록을 확인했다고 밝혔다그동안 충무공 부인은 목민관인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외동딸로, 이름은 태평, 연화 등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이름은 확인되지 않았다.

 

충무공은 스물한 살의 나이로 상주 방씨(尙州方氏) 가문의 딸과 결혼했고 문과 시험을 공부하다가 결혼 이듬해부터 무과 시험을 준비했다.

 

선조는 159811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충무공에게 우의정을 증직하고 처인 방씨를 정경부인으로 봉한다는 교지를 내렸다. <2018. 9. 7일. 서울신문, 아이뉴스 24에 

 

-9월 11일. 방수진은 “충무공 장인 이름”이라고 하는 반박 글이 보도됨.  

 

 

 

 

독송사

이글은 충무공께서 정유년 일기에서 송나라 역사를 읽고 쓰신 독후감이다. 

 

 

 

거북선 제원. 내용은 잘 보이지 않음

 

 

 

 

충무공 이순신 장군 내력과 정신

 

* 멸사봉공. 나는 위에 나온 이순신 장군의 이 글귀로 대신하고 싶다. 1597년 1월 가토 기요마사가 다시 조선을 침략한다는 정보를 접한 선조는 가토를 바다에서 공격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거짓 정보라고 판단한 이순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선조는 이순신이 어명에 불복했다 하여 체포 한양으로 압송 하옥하고 그 후임으로 원균을 임명했다. 아무리 임금의 명이라 하더라도 옳은 길이 아니면 따르지 않는 그것이 멸사봉공 정신 아닐까. 요즘도 그렇게 하지 못할 일을 하늘 같은 임금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을 대역죄. 요즘 관료들 잘 보고 배우길 바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보탠 다면 난중일기에도 나오듯이 늘 그의 어머님을 생각하는 마음.

 

 

 

 

이순신 장군 가계도

 

 

 

 

충무사를 나와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말씀

 

1.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능히 천명을 두렵게 할 수 있음을 알리는 바이다. <명량해전 하루 앞 1597년 9월 15일 밤 하신 훈시 말씀>

 

2.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입니다. 만약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본진을 한산도로 옮겨 진을 치고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획입니다. <1593년 7월 6일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 내용>

 

3. 석 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 한 번 휘둘려 쓸어 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1594년 4월 한산도에서 제작한 장검 2자루에 새긴 검명>

 

4. 1597년 8월 중순 왕<선조>이 '수군을 해산하고 육군과 합세하라'는 명령에 국가의 존망이 걸려 있는 수군을 없앨 수 없다고 올린 장계에서

 

5.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군사들을 놀라게 해선 안 된다. <노량 해전이 한창이던 1598년 11월 19일 적탄에 맞아 숨을 거두시며 하신 말씀>

 

6. 대장으로서 화친을 말할 수 없을 뿐더러 이 원수를 보낼 수는 없습니다. <1598년 7월 17일 임진왜란을 일으킨 풍신수길이 죽으면서 철군 명령을 함에 따라 왜군이 철수하려고 할 때 명의 제독 진린은 길을 열어주자고 하였으나 이에 절대 길을 내어 줄 수 없다고 반대하면서 하신 말씀>      

 

7.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겠습니다. <1598년 11월 17일 밤, 노량에서 최후의 전투 준비를 하면서 천지신명께 맹세한 말씀>

 

8.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겁게 행동하라. <1592년 5월 7일 경상도로 출전하여 처음 전개한 옥포 해전을 치르면서 하신 말씀>         

 

 

충무공 이순신 장 가르침. 본인이 겪은 일을 말하고 있음

 

 

 

  

최초 삼도수군 통제영 제승당 연혁

이 연혁 맨 아래. ---저는 괴로운 진중에서도 나라의 은혜가 망극하여 벼슬자리가 정헌<正憲>에 오르니 감격하기 그지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호남지방은 나라의 울타리라 만일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그대로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진을 (여수에서) 통영으로 옮겨 치고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책을 수립하였습니다.--- (1593년 7월 16일. 지평 현덕승<1564-1627. 임란 때 여러 전공으로 고을 수령 및 지평<사헌부 정5품 관직>. 예조정랑을 지냄>에게 보낸 편지에서)

운주; 뜻은 아래 알림판에서 "지혜로 계책을 세운다." 따라서 운주당은 "지혜로 계책을 세운다는 집"

 

 

 

 

최초 3도수군통제영 제승당의 어제와 오늘

 

 

 

이충무공 후손 삼도수군통제사 공덕비

 

 

 

이충무공 후손 통제사 공덕비

 

 

 

제121대 통제사 이태상<5대손> '통제사이공태상거사비'

 

 

 

제138대 통제사. 이한창<6대손> '천추불망. 통제사이공한창거사비. 무휼도민'

 

 

 

제172대 통제사 이승권<8대손> '가선대부. 삼도통제사이공승권영세불망'

 

 

 

 

 

 

백범 김구 선생 한산도(제승당) 방문 기념사진

과거 임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격침하였던 한산도 제승당을 방문하고 충무공 영정에 참배하였다. 참배 뒤 좌우를 살펴보니 제승당이란 현판이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연유를 물으니 왜정 때 떼고 달지 못한 것이라 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보관한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하여 즉시로 그 현판을 걸게 하고 돌아 나와 진주를 방문하였다. 방문 날짜가 잘 보이지는 않으나 1946년 9월로 여겨진다. <아래 글에서> 

 

 

 

 

한산만

 

 

 

 

한산대첩 기념비와 거북등대

 

 

 

 

 

 

 

*다음은 거제도 저구항으로 가서 지난번에 빠뜨렸던 큰 매물도 장군봉에서 대항 나루까지와 오후엔 맨 처음<2014. 9월> 밤에 지났던 거제도의 칠천도 초입에서 거가대교<해너미 장면. 처음에는 해돋이>까지. 그밖에 통영 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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