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통영 16-2 <연화섬>

아리1 2018. 12. 9. 20:26

10/18. 디지털 사진기와 손전화기로 찍은 사진이 너무 많아 두 군데의 사진을 짬에 맞게 끼워 넣기가 힘들어 처음으로 따로따로 올리기로 함. 16-1은 디카, 지금은 손전화기. 두 기기로 찍는 까닭은 서로 좋은 점 그렇지 않은 점이 있기 때문 특히 밤엔 손전화기로. 보통 디카 경우는 세 개 정도의 약을 가지고 다니는데 어떤 날은 모두 동이 날 때도 있음. 특히 추운 날은 더욱 그러함. 지난날 같으면 필름을 몇십 통씩이나 가지고 다녀야 할 분량인데 세상 참 좋기는 좋은 모양이다. 손전화기는 사진을 찍을 때는 크게 닳지 않으나 기사 등 무엇을 찾아볼 때는 뜻밖으로 많이 닳음. 연화섬에 다시 가게 된다면 사명대사 토굴, 보덕암, 용머리를 볼 수 있는 곳<아래에 나와 있는 빨래터>

 

 

 

연화 나루에서 연화사를 거쳐 연화봉으로 거기서 다시 나루 부근으로 와서 용머리 쪽으로. 돌아와서 소섬<우도>으로.

 

 

 

 

 

 

연화사

이 사찰의 역사는 5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연산군의 억불정책으로 한양에서 이 섬으로 피신해온 승려가 불상 대신 둥근 전래석을 토굴에 모시고 예불을 올리며 수행하다가 깨우침을 얻어 도인이 되었다도인은 입적하면서 바다에 수장시켜 달라는 말을 남겼다. 유언대로 제자들과 주민들이 수장했더니 도인의 몸이 한 송이 연꽃으로 피어나 승화했다. 이에 따라 섬 이름을 연화도(蓮花島)’로 일컬었으며 입적한 승려도 연화(연꽃)도인이라고 불렀다

그 뒤 사명대사가 이 섬으로 들어와서 연화도인이 수행하던 토굴 아래에 움막을 짓고 정진한 끝에 마침내 큰 깨달음을 이루었다. 얼마 뒤 사명대사는 그를 찾아 연화도로 들어온 세 여인을 출가시킨다. 사명대사의 누이동생인 보운, 대사를 짝사랑하다가 비구니가 된 보월, 대사가 출가 전 정혼했던 보련 등이 그들이다.

이러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연화도에 실제로 사찰이 들어선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98<어떤 곳은 1988년> 8월에 이르러서야 하동 쌍계사의 조실(큰스님)이던 고산이 연화봉 아래에 연화사를 창건한 것이다. 돌담과 89층 진신사리 석탑 등이 어우러진 매우 여성스럽고 운치가 있는 절이다. 이곳 연연화사에는 대웅전, 범종루, 일주문, 천왕문, 미륵불, 팔각구층석탑, 요사채, 진신사리 비 등이 들어서 있다.

처음 섬에 들어온 시기는 약 130여 년 전으로 도산면<통영시> 수월리에 살던 김해 김 씨가 흉년으로 인해 뗏목을 타고 이곳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네이버 백과에서>

 

*다음이나 네이버 등에 창건 연도를 알아보니 1988, 1998년 이렇게 나오니 대체 무엇을 믿으라는 건가. 심지어 같은 백과에서도 이러니. 

 

 

 

연화장세계문 <청정과 광명이 충만한 이상적인 불국토로 들어가는 문>

 

 

 

 

 

연화사<낙가산연화사. 위에 나와 있듯이 이 절이 지어진 것은 1998<1988>8월 하동 쌍계사의 조실(큰스님)이던 고산이 연화봉 아래에 연화사를 창건함>

 

 

 

 

천왕문

 

 

 

대웅전

 

 

 

불연의 섬 연화도

 

<위의 글 잘 안 보여서 다시 옮겨 적음. 위의 내용을 크게 하여 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귀중한 자료인 줄은...>

 

이곳 연화도를 불연(佛緣)의 섬이라고도 하는 바 이는 이곳 연화봉에 실리암을 짓고 수도하였다고 하며,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수도한 흔적과 전설이 곳곳에 배어있는 까닭이다. 조선 중기 사명대사는 조정의 억불정책으로 남해 금산 보리암에서 수도를 하고 있었다. 그의 처 보월(金寶具), 여동생 보운(任彩雲), 연인 보련(黃玄玉)이 그를 찾아 전국을 헤매던 중, 보리암에서 극적으로 만나 이곳 연화도로 피신하여 연화봉 아래 토굴에서 수도 정진하였다 하며, 네 사람은 이곳에서 이렇게 만난 것은 세속의 인연, 불연의 인연, 삼세의 인연이니 증표로 삼는 시를 각각 한 수씩 남겼기에 이에 밝혀 둔다. 이 세 비구니를 자운 선사라 하며, 후일 이들은 토굴을 떠나면서 부··재(··財)라는 글을 판석에 새겼으며 지금도 마을에서 실물을 보존 관리하고 있다.

·

1. 사명의 시

광막한 넓은 천지에 조알같은 이내 몸이 나고죽고 죽고나고

그 몇 겁이 되었더니 한의 바다 정의 하늘을 다시는 말을 마소

대천세계도 눈 속의 꽃이로세.

 

2. 보운의 시

창해의 한낱조알 아득한 이내몸이 삼세 인연을 믿을 수 있으랴

두어자 짧은 비석이 그 옛일을 말하나니 보운 보련 보월이 어찌 남이리오.

 

3. 보련의 시

연화도인 잠드신 곳에 세 낭자 무삼일로 옷깃을 적시나니 

그대 만난 자리에 전생일 말 하자니 가련할 손 끼친 원한 바다 보다 깊을세라.

 

4. 보월의 시

이생의 만남과 이별 몰래 혼을 녹이거니 딴 세상 인연일랑 또다시 의논 마소

창해 물 다 기울여 이내 가슴 씻기고저.

 

*사명대사 <泗溟大師. 1544-1610>

조선 14대 선조 때의 고승

속성; 풍천 임씨

출생지; 경남 밀양

속명; 임응규

호; 송운, 사명

승명; 유정

시호<광해군이 내림>; 자통홍제존자 (慈通弘濟尊者)

 

*위의 억불정책 시기는 연산군 때 임.

 

 

 

*사명대사

 

1. 사명대사께서 이 섬으로 들어와서 연화도인 토굴터 및에 움막을 지으시고 대 해탈의 원을 세우고서 정진하던 중 마침내 큰 깨달음을 이루셨다. 얼마 뒤 사명대사를 찾아 연화도에 들어온 스님의 속가누님 등 여인 세분을 출가시켰으니 보원, 보련, 보월이라 했다.

임진년에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받으니 사명 대사는 육지에서 승군을 일으켜 일본군을 막았으며 바다에서는 보운, 보련, 보월 세분 비구니 스님이 이순신장군과 거북선을 건조하여 일본근을 대적하니 승승장구 하였다. 이순신 장군께서 이 세분 스님을 일러서 자운대사라고 하였으며 거북선 도면을 이 세분 스님들이 전수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곳 연화도에는 지금도 연화 도인이 손가락으로 글을 쓰셨다는 비석과 전래석이 연화봉 산신각에 보존되어 있으며 연화도인과 사명대사와 세 분 비구니스님의 토굴터가 있다.

 

2. 1575(선조 8) 선종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 (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하였다. 

1593(선조 26)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선조는 사명대사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그 뒤 전후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회담을 하였다. 

1604(선조 37)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왕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선조 37)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 성과를 거두었다. 임진왜란 때 잡혀 간 3,000여 명의 사람을 데리고 1605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으로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 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8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다음 백과에서>

 

*1604년 서산대사 부음 뒤 선조의 명에 곧장 왜로 간 것으로 보아 우리가 알고 있던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와의 관련된 이야기는 전설이었다.

 

 

 

연화봉으로

 

 

 

연화섬 4대 비경

 

 

 

연화봉에서 다시 나루로 내려옴<오른쪽부터 연화도, 반하도, 우도>

 

 

 

다시 용머리 있는 곳으로

 

 

 

가장 높은 곳이 연화봉. 아래로 보이는 절은 보덕암<연화사를 지나 연화봉으로 가는 길과 이쪽 출렁다리로 오는 사이에 놓여 있어서 미처 가지를 못함>

 

 

 

전봇대가 있는 길이 아닌 산길로. 꼭대기에는 전망대

 

 

 

이 정도 바위이면 이름이라도 <맨처음 그림 지도에 나오는 대바위 다들달바위?>

 

 

 

보덕암

 

 

 

역시 멀리로 보이는 곳은 욕지섬

 

 

 

         

 

 

 

이 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이 "불연의 섬 연화섬에 나오는 사명대사와 관련된 이야기와 바로 이 바위"로 여겨지는데

이를 미쳐 보지 못하고 지났다면 연화섬 갔다 왔다는 소리를 못할 정도로 신기 괴이하다.

내가 알기론 위치가 묘해서 대부분은 바로 옆까지만 왔다가 그냥 지나친 것으로 생각된다. 마치 매미가 나무에 붙어 있는 듯한 모습이다.

 

 

 

 

 

 

 

 

 

 

 

길. 언제나 보아도 멋집니다.

 

 

 

 

 

 

 

 

 

 

용머리바위. 여기서처럼 먼 곳에서는 볼 수 있으나 정작 가장 가까이 가서는 볼 수 없음.

 

 

 

 

 

 

용머리 바위

 

 

 

 

 

 

용머리 바위를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나 실제로는 보이지 않음.

 

 

 

 

 

 

 

 

 

 

 

 

 

 

 

 

 

 

 

 

 

 

 

 

 

 

 

출렁다리를 지나와서 본 만물상

 

 

 

 

 

 

 

 

 

 

 

 

 

 

 

 

 

 

 

 

 

 

 

 

 

 

 

이제부터는 발길을 돌려야 할 때인가 보다. 소섬으로. 이 바위 더는 갈 수 없음.

 

 

 

 

 

 

소섬

 

 

 

 

 

 

*연화사 창건 연도를 방금 전화로 물으니 그 분도 거기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른다 함. 1988년은 아니라고 함. 내일 알려 주기로 함. <12/11일. 17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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