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통영 18 <충렬사>

아리1 2018. 12. 14. 08:05

2018. 10/19. 금. 비진도에서 통영으로. 13시 40분 출발 14시 30분 도착해서 점심도 먹고 여유롭게 짬을 보냄. 서호 시장을 지나 충렬사로 감. 여객항에서 걸어서 10여 분 거리. 충렬사로 가는 길에 마침 예사롭지 않은 우물<충렬사와 맞은 편. 통영 명정>을 만나서 먼저 둘러봄. 여름철<3월-9월> 09-18시까지, 겨울엔 09-17시. 한 해 하루도 쉬는 날 없음. 

 

 

 

15시 45분                                                                                                 통영 명정

 

이 우물을 처음으로 만들 때에는 주변에 민가가 없어서 충렬사에서만 사용했다 한다. 처음에 하나를 파고 보니 물이 탁하고 곧 말라서 두 개의 우물을 동시에 팠더니 비로소 물이 맑고 수량이 많아졌다고 한다. 우물은 오랜 가뭄에도 물이 줄어들지 아니하므로 몇 년만 해도 주민의 주요 식수원이 되었다고 한다.

 

 

 

 

두 우물<바로 아래 반 정도만 나온 우물이 일정, 오른쪽이 월정. 그래서 명정이라 한다.>

 

 

 

수조. 멀리로는 물이 빠져나가는 곳

 

 

 

사적 제236호 충렬사 알림돌

 

 

 

 

통영 충렬사

 

사적 제236호. 조선 선조의 명에 따라 제7대 통제사 이운룡이 1606년 세웠으며, 해마다 봄·가을 두 차례 충무공 이순신의 제사를 올리고 있는 곳이다.

1663년 현종은 홍살문을 다시 세우게 하고 충렬사라는 이름을 내려 현판으로 걸게 하였다. <아래에서>

 

-위 네모 안 글 세 번째 줄에서, 바로 앞 경충재와는 달리 "숭무당<경충재와 같은 외삼문 안에 있음>을 짓고.......담당하게 하였다"에서

연도나 통제사는 누구인지 나와 있지 않음.

제71대 통제사인지 제92대 통제사인지. 두 통제사 모두 이름은 김중기로 같음. 

-1663년 현종이 홍살문을 다시 세우게 했다는 것은 그 앞에서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영 충렬사 배치도 <남상학의 시솔길에서>. 아래 서제와 동제는 서재와 동재로. 경충제도 경충재로.

 

 

 

 

 

홍살문

 

충렬사의 여섯 개의 문 가운데 첫째 문이다. 2개의 둥근 기둥 위에 지붕 없는 붉은 살을 열 지어 박아 세웠다.

홍전문(紅箭門)이라 쓰고 홍살문이라 읽으며 때로는 홍문(紅門)이라고도 하는데 정 2품 이상의 신위를 모신 사당에만 세울 수 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은 편에 있는 통영 명정에서 본 홍살문

 

 

 

정문

 

홍살문 다음 계단을 오르면 나타나는 첫 출입문이다. 문구조인데 양편의 협문은 출입구<출입구, 왜놈식 한자어. '드나드는 문'>이고,

가운데 문은 신문(神門)이라 하여 제삿날에 열어 신을 맞아들인다.
 

 

 

 

통영 충렬사 동백나무 

 

 

충렬사 동백나무. 경상남도 기념물 제74호. 나이 400여 년. 키 6미터. 나뭇가지 지름 7미터.

 

 

보호수 <강한루 앞 느티나무>

 

 

전시관

오늘은 한 해에 한 번 소독하는 날이라 볼 수 없다 함. 가는 날이 장날이 아니라 이런 날을 맞춰 가기도 참으로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는 다음 날인 10/20일. 17시 50분. 이곳 전시품에도 명나라 신종이 보낸 팔사품이

있으나 사실 여부를 떠나 한편으론 기분 좋은 일이 아니어서 싣지 않음. 한산섬 제승당 할 때 다루었기도 함.  

 

 

 

 

   현자총통<玄字銃筒. 손잡이 하나>. 보물제885호(1986.11.29 지정). 제작시대 : 1596년 (선조 29년). 길이 : 70cm. 구경 : 75mm. 중량 : 50kg

지자총통<地字총통. 손잡이 둘>보물제862호(1986.3.14 지정). 제작시대 : 1577년 (명종 2년). 길이 : 89.5cm. 구경 : 105mm. 중량 : 73kg

 

* 당시 세계최강 영국해군의 함포는 연철(鉛鐵)로 총구를 만들어 적중률이 떨어졌으나 조선총통은 주물로 부어 만들어 정확도가 우수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총통들은 진짜가 아니라는 것쯤은.

 

 

수조도병풍 <아래는 왼쪽부터 동영충렬사 춘추제향 홀기. 사제문. 충무공전서>

 

 

수조도 병풍<水操圖屛風. 19세기 통제영 파총<종4품> 정효현 그림>

 

조선 후기 삼도 수군의 해상훈련 모습을 그린 병풍. 당시 통제영에서는 봄 훈련 때 정기로 충청, 전라, 경상 삼도 수군이 모여 대규모 훈련을 하였다. 병풍 상단의 부두기는 삼도 수군의 진영별 전선, 병력, 군량미의 수와 본영까지의 거리를 세세히 기록하였으며

그 수는 전선 548척<거북선 48척 포함>, 장졸 36,009명, 군량미 89,298석에 달한다.

 

 

동영충렬사 춘추 제향 홀기

 

충렬사 춘추 제향에 사용되었던 절차서, 제례 순서 및 진설도<상차림>, 축문 양식이 수록되어 있어 지금도 그에 따라 제사를 모시고 있다.

 

 

어제사제문 (御製賜祭文.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이 지어 내리신<1795> 제문)

 

 

사제(賜祭)란 임금이 죽은 신하에게 제문을 내려주는 것이다.

 

정조 19년(1795) 11월(정축. 丁丑)에 충무공 전서를 펴내면서 충렬사에 한 질을 보관하게 하고, 통제사 이득제(제147대)에게 명조 팔사품도 함께

장소를 알맞게 진열하고 술과 고기를 위패 앞에 모신 다음 투구와 갑옷을 입은 채로 잔을 올리고 제사하라 하신 정조 임금님의 하사 제문이다. 

 

 

사제문<통영 충렬사 누리집에서>

 

전서를 한 질 보내니 명황제가 보낸 팔사품을 사당에 진열하고 또 독대·총통·피리·북 등을 사당 안팎의 적당한 장소에 놓고

위패 앞에 술과 고기를 차리고 투구와 갑옷을 입은 채로
유명수군도독·조선국 증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대강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 겸 영경련·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덕흥부원군·행정헌대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제사·충무공 이순신에게 정성을 다하여 잔을 올리고 이 한 질을 봉안하라.
충무공을 알고저 하는 자는 빛나고 찬란한 이 전서를 보아라.
싸우던 공적이며 변화치던 형세와 거북 같은 배와 기러기 울던 물가에서 진린(陳璘)·등자룡(鄧子龍)과 더불어 전라·경상에 진을 치고

 바다와 산에 맹세할 제 초목도 그 이름을 알았더니라.

 

 

 

충무공전서

 

 

정조 19(1795) 충무공전서를 발간하고 어제 제문을 하사하였음.

148. 활자본. 1795(정조 19) 규장각검서 유득공(柳得恭)이 편집·간행을 감독하여 교서관에서 간행했다.

책머리에는 임진왜란 때 임금이 내린 교유문과 영조·정조가 내린 사제문, 영패도·독전기도·영기도·구선도·전라좌수영구선도 등이 실려 있다.

시는 한산도야음 閑山島夜吟등 모두 5편으로, 적은 분량이지만 이순신의 우국충정을 느낄 수 있다.

장계에는 왜란 발생 직후의 상황과 대비책, 옥포해전 등에서의 전적, 군량미 마련책, 병력확보책, 전쟁 중 인재 확보책,

질병 대책 등 전란 중에 일어났던 일들을 담고 있다.

 

문집 대부분을 차지하는 난중일기 亂中日記>159211일부터 15981117일까지의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백의종군 때의 기록 등 몇몇 빠진 부분도 있지만, 전투상황과 수군실태 등이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부록으로는 종자 분()이 쓴 행록, 최유해(崔有海)가 지은 행장, 이항복의 전라좌수영대첩비 등과 <기실 紀實이 실려 있다.

이 가운데 기실명사 明史〉 〈진린전 陳璘傳, 징비록 懲毖錄, 지봉유설 芝峯類說, 난중잡록 亂中雜錄등에서 이순신에 관한 기록만을 자세히 뽑아 엮은 글로 그의 인품과 일화를 살필 수 있다. <다음 백과에서>

 

 

거북선(龜船)

 

 

거북선은 고려 말 또는 조선 초부터 이미 제조, 사용되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왜구의 격퇴를 위하여 충무공 이순신께서 돌격선으로

특수하게 만들고 쓰인 전선이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아군의 병력을 보호하고 적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면서 적진을 휘젓는 돌결선으로서의 거북선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에 앞서 이순신은 전투 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의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이 제도는 배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다.

그리고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어 입은 총구멍으로 활용하였으며,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꼬리 밑에 충구명을 설치하였다.

 

좌우에도 총구멍이 각각 여섯 개가 있었으며, 군사는 모두 그 밑에 숨어 있게 하였다. 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고

전후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나는 것처럼 빨랐다.

싸울 때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송곳과 칼날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 적이 뛰어오르면 송곳과 칼에 찔리게 되고,

덮쳐 포위하면 화총을 일제히 쏘았다.

그리하여 적선 속을 횡행하는데도 아군은 손상을 입지 않은 채 가는 곳마다 바람에 쏠리듯 적선을 격파하였으므로 언제나 승리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선조 25) 5월 1일의 내용-  

 

 

거북선 모형도<왼쪽부터 전라좌수영구선, 통제영구선>와 돌거북

 

 

 

 

 

 

 

시월 하순으로 들어가는데 꽃? 이름 모름. 동백나무인 것 같으나.

 

 

 

 

강한루(江漢樓)

 

제172대 통제사 이승권(李升權 : 이충무공 8세손)이 1840년에 지은 누각. 예로부터 충렬사를 찾은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 누대에 올라

이 충무공의 큰 덕을 되새기며 동백 고목과 더불어 후원의 푸른 죽림을 자주 시제에 올렸던 영남 유수의 수영(水營) 누각(樓閣)이다. 

전형적 조선의 팔작지붕 양식으로 정면 세칸, 측면 세칸의 익공식 이층 구조에 아래 층 뒤편에는 통용문인「영모문」현판이 걸려있으며

이층 누마루는 우물마루에 계자난간을 두르고 연등천장을 하고 있다.

 1915년 무렵 비바람에 쓰러진 강한루 영모문은 1987년에 복원하였다.

 

 

 

 

강한루 알림

 

 

* 강한루 이름 유래

강한(江漢)은 중국(中國) 호북성(湖北省)의 성도(省都)무한(武漢)에 있는 地名이다. 무한(武漢)을 가로질러 흐르는 장강(長江)과 지류(支流)인 한수(漢水)가 합류하는 지역으로 장강(長江)에서 「강(江)」, 한수(漢水)「한(漢)」, 이 두자를 취하여 강한(江漢)이라 부르며

예로부터 열국이 각축하던 삼국지의 무대이며 이름난 경승지(景勝地)이다.
 이 강한(江漢)의 대안(對岸)에는 이백(李白)의 시(詩)에 등장하는 황학루(黃鶴樓)와 항주(抗州)의 서호(西湖)와 비견(比肩)되는 동호(東湖)가 있다.
  또 고대(古代) 주(周)나라 때 이곳 강한변(江漢邊)에서 소호(召虎)가 적의 항복을 받아 나라의 우환(憂患)을 씻었다는 고사(古事)가 있다.
  1840년 제172대 통제사 이승권(李升權)이 여기에 누대(樓臺)를 지을 때 시인 강위(姜偉)가 경승지 통제영과 이충무공의 위업을

이 강한의 고사에 연관지어 강한루(江漢樓)라 이름하였다고 전해진다.

 

* 강위의 시 『강한루』

江 漢 樓
試溯神仙夢(시소신선몽) 重開漢上襟(중개한상금)
孤月行天遠(고월행천원) 衆流到海深(중류도해심)
逢人問古地(봉인문고지) 對酒憐初心(대주련초심)
忠烈祠堂在(충렬사당재) 天涯已再尋(천애이재심)

물길 거슬러 신선의 꿈 아렸더니
강한루 다시 올라 흉금을 활짝 연다.
외로운 달 먼 하늘 떠가고
개울물 모두 흘러 깊은 바다로 가는구나.
사람만나서 옛 땅 물어보고
술 나누는 첫 마음 애닯기도 하여라.
여기 충렬사 있어
찾아온 지 벌써 두 번째렸다.!

 

 

 

영모

 

 위의 강한루 소개에도 잠깐 나왔듯이 같은 집에 두 개의 이름이 나와 있음. 들어갈 땐 강한루<2층>, 나올 땐 영모문<1층>.

이 문의 뜻을 알아보려 하나 찾기에 어렵다.

 

 

 

 

 

외삼문

 

삼문 가운데 바깥에 있는 삼문으로 왼쪽 오른쪽으로는 충렬묘비를 비롯하여 비각 여섯 채가 나란히 늘어서 있다.

외삼문은 좌·우의 비각과 잘 어울려 조선 건축의 조형미가 빼어난 건축물로 손꼽히며 광복 후에 대한민국 우표의 도안으로 사용되었다.

 

 

 

 

외삼문과 왼쪽 오른쪽 비각

 

 

 

 

 

통영 충렬묘비

 

 묘(廟)는 사당을 뜻하고 비명(碑銘)은 비에 새긴 글이다. 

 

 

 

충렬묘비명

 

충무공 이순신 장군(1545 - 1598)의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공, 위는 선무공신 1등. 덕풍부원군 영의정이시다.

<나머지 글은 위의 충렬묘비와 같음>

 

 

 

 

제1호 비각. 충렬묘비. 

외삼문 동쪽 첫째 비각. 높이 2.2m 폭 1m 두께 0.46m의 비석으로, 기단은 거북이 모양이 아닌

방형(方形)이며, 비머리는 구름과 용으로 장식되어 있다. <위의 "통영 충렬묘비"에는 거북 받침대로 나와 있으니 잘못인듯하다.>

 

 

 

 

충렬묘비 부분부분 모습

 

 

 

 

제2호 비각. 제111대 통제사 이언상(1681-1775) 사적비

 

이충무공의 5세 손이요 위(位)는 가선대부<종2품)에 이르렀다. 덕수이씨 충무공파의 직계 손 가운데 처음으로 통제사가 된 분으로

재임 중(영조 21년 1754.12 - 1747.10) 선대 충무공을 본받아 군선 관리와 갑병(甲兵: 병사의 무장)에 큰 공적을 남겼다. 

형제 세 분과 아래 직계 삼대로 모두 여섯 통제사가 배출되어 가문의 중흥을 이룬 분으로 충무공과 함께 아산 현충사에 배향(配享. 제사에 올림)되어 있다.

 

 

 

 

이언상 비

 

 

 

제3호 비각. 덕수이씨 후손 통제사 공적비

 

덕수 이씨 후손 통제사 공적비. 충무공 이순신 초대 삼도 수군통제사 이후로 부임한 열두 명의 후손 통제사 가운데

위에 적은 다섯 분의 공적비이다.

 

 

 

 

직계후손 통제사 5위의 공적비<통열 충렬사 누리집에서>

 

 

왼쪽으로부터 <통열 충렬사 누리집에서>

(1) 가선대부 삼도수군통제사 이 태 상(李泰祥) 거사비 (제121대)
      (2) 가선대부 삼도수군통제사 이 한 창(李漢昌) 영세불망비 (제138대)
     (3) 가선대부 삼도수군통제사 이 한 풍(李漢豊) 영세불망비 (제143대)
     (4) 가선대부 삼도수군통제사 이 항 권(李恒權) 영세불망비 (제167대)

(5) 가선대부 삼도수군통제사 이 승 권(李升權) 거사비 (제172대)

        * 가선대부(嘉善大夫) : 종2품의 관위(官位). 왕실종친과 문무관에게 줌

        거사비(擧事碑) :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는 재임의 공적을 새긴 비.

 

 

 

제4호 비각. 제70대 통제사 최 숙 사적비

 

 

우암 송시열 선생의 문하생으로 조선 숙종조의 무신. 제70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1694.8~1695.8)하여 병선건조와 군율 정비 및 충렬사 보수에 크게 힘쓰신 분이다. 통제사로 도임한 지 삼 일 만에 충렬사를 참배하고 풍우(風雨)에 심히 퇴락한 사우를 다시 정비하였다. 

또 경내에 경충재(景忠齎)를 세워 영내의 문무관 자녀들에게 글과 충무공의 정신을 가르쳐 타지에 부급(負及 : 외지 유학)하지 않고도

이곳에서 면학하여 시문을 깨우침으로써 이 땅이 진실로 이름난 고장이 되었으며 이 때 세운 서당이 충의의 명문, 충렬서원이다.

 

충렬서원은 대원군의 1.2차 서원철폐(1864. 1868) 때에도 이충무공의 사당 가운데 유일하게 제외되어 존속되었다.

이때 세운 서당이 충의의 명문, 충렬서원(경춘재)으로 외삼문 안, 서편에 있다.

 

 

 

 

 

 

제5호 비각. 제7대 통제사 이운룡(1562-1610) 기적비

 

시호는 식성군(息城君). 경북 청도 출생. 24세 무과 급제. 이충무공과 함께 함경도 시전부락전투에 참전한 바 있고 31세 옥포만호

재임 중 임진왜란 일어남. 원균,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많은 공을 세움. 변란 뒤 비변사 당상관을 거쳐 제7대 삼도 수군통제사 제수됨.

재임시(1603.2-1605.9) 선조의 명을 받아 통영충렬사를 창건(1606). 경남 의령군 오정리 기강서원에 배향되었다.

 

 

 

이운룡 비<맨 위 전서체는 "조선선무공신삼도">

 

 

 

제6호 비각. 제5대 통제사 류 형(1566-1615) 기적비(紀跡碑)

 

시호는 충경공(忠景公), 명문가 경원 부사(府使) 용(溶)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세 살에 부친을 여의고 26세에 모친을 여의었다.

열다섯에 참의(參議) 조인(趙認)에게서 글을 배워 시문(詩文)과 사서(史書)에 통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휘하에 들어가 강화도에서 종군하였다.
이십구 세에 무관 별시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어 선조 임금께서 탐라말(耽羅馬 : 제주산 말)을 하사받고 진충보국(盡忠保國)하기로 맹세하였다. 

훈련도감의 파총(把摠 : 종사품의 무관)을 거쳐 해남 현감이 되어

이순신 장군께서 순직하신 마지막 노량해전에 함께 참전하여 여섯 발의 적탄을 맞아

<그러고 보면 이순신 장군의 순직이 더더욱 아쉽게 느껴진다.> 모두 살아나기 힘들 것이라 하였으나

끝까지 전투를 지휘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부산진 첨사에 특진 되고

 경상 우수사를 거쳐 제5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순신 장군 생전에 통제사의 재목으로 낙점받은 문무겸전한 장군으로 문집으로는 석담유고(石潭遺稿)를 남겼다.

 

그런데도 49세로 생을 마쳤으니....

 

 

제5대 수군통제사 류형 기적비<전서체는 제5대 삼도 수군> 한글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비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하다.

 

 

 

외삼문을 들어와서. 동쪽 비각

 

 

 

외삼문. 들어서면 숭무당<동쪽>과 경충재가 있음.

 

 

 

서쪽 비각

 

 

 

경충

 

 

외삼문 안 서편에 있음. 숙종 21년(1695) 제70대 통제사 최숙이 지음. 

지방의 청소년들에게 학문과 충의를 가르치던 강당으로 충렬서원이라 불렀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1864)도 이순신 사당 가운데 유일하게 제외, 존속되었던 유서 깊은 서원이다. 

<지붕까지 다 나오지 않아서 그런지는 모르나 왠지 균형이 맞지 않아 보인다.>

  

 

☞ 주련<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
水國秋光募 수국추광모
驚寒雁陣高 경한안진고
優心輾轉夜 우심전전야
殘月照弓刀 잔월조궁도


다도해에 가을빛 저무니
찬바람에 기러기 떼 높이 날고
나라근심에 뒤척이는 이 밤
지는 달만 활과 칼을 비치누나.

 

 

 

숭무당

 

 

외삼문 안 동족에 있음. 어느 글에숙종 21년(1695) 제70대 통제사 최숙이 경충재를 지은 데 이어,

숭무당은 같은 해 제71대 통제사 김중기가 지었다고 나와 있으나,

또 다른 글에서숙종 45년(1719) 제92대 통제사 김중기가 춘추 향사와 충렬사 전체의 관리를 위해 지었다고 나온다.

 

"통영충렬사 누리집. http://www.tycr.kr/installation.php"에는 이에 어떠한 견해도 밝히지 않고,

막연히 "통제영에서 파견한 장교 3명이 상주하면서 사우(祠宇)와 위토전답을 관리한다"라고만 나와 있다.

경충재나 다른 집들엔 맞든 아니든 그때의 연도, 임금과 통제사를 밝히고 있으나 숭무당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분명 모르거나 확신이 가지 않는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이는 이 글 맨 처음 부분에 나오는 "통영충렬사" 알림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런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어서 통영 충렬사에 대한 연도별 일어난 일을 체계 있게 꾸밀 필요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

 "조선조 삼도 수군통제사 록. https://blog.naver.com/munjunggong/221277933678"을 보니,

제71대<숙종 21년. 1695>와 제92대<숙종 45년. 1719> 통제사 이름이 한글 한자 모두 다 같은 김중기. 金重器.

다른 점은 앞의 통제사는 3개월 만에 잡혀감, 뒤의 통제사는 1년 4개월 뒤 사임. 

 

어느 자료에 김중기가 나고 죽은 해는 "?-1735년"인 점으로 보아 둘 다 같은 사람으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또한, 경충재를 지은 지 24년 동안 빈터로 남겨 놓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두 번이나 통제사를 했다면 (이순신 장군을 빼면 없을 것 같은데)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실제는 제71대 통제사일 때도 비리로 석 달 만에 잡혀갔고 제92대 때도 2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1년 4개월을 하고 물러난 뒤

옥살이하다가 처형되었으니 극과 극을 넘나드는 사람이 아니었나. 이는 그 무렵 당파싸움의 산물이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오늘도 이것(?) 하나 때문에 밤을 지새우는구나.>  

 

주련<위의 기둥에 있는 글과 아래 나오는 글의 순서가 다름>
 

天日成盟草木知 천일성맹초목지
閣上麒麟圖像肅 각상기린도상숙
鼓邊??鐫名休 고변과두전명휴
江山不息英雄氣 강산불식영웅기
江漢悠悠忘千秋欲慕風風 강한유유망천추욕모풍풍


하늘에 맹세하니 초목도 아는도다
기린각에 그린 모습 엄숙도 한데
북가에 새긴 이름 아름답구나
강산에는 영웅기상 끊임이 없도다
강한은 유유히 천년을 흐르고
경모하는 마음은 쉼 없는 바람이어라.

 

 

 

 

충렬사(사적 제236: 1973611일 지정)

통영 충렬사는 임진란이 끝난 8년 후인 선조 39(1606) 이운룡 제7대 통제사가 왕명을 받들어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위훈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통영 충렬사 묘비아래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1614년(광해군 6년)에 시작하여 1681년(숙종 7년)에 세웠다는 것으로 보아 무려 67년이란 긴긴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도별로 보면,

1606. 통영 충렬사. 선조 39. 이운룡 제7대 통제사. 왕명을 받들어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위훈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세움.

1614. 충렬묘비. 광해군 6년 좌의정 이항복이 지음. 비문 끝부분은 우암 송시열이 묘비를 세욱 된 경위를 기록함.  

1663년. 정침(正寢, 정당)과 외삼문의충렬사현판. 현종 임금 사액현판(額懸板). 문정공(文正公) 송준길 씀.

        현종이 홍살문을 다시 세우게 함.

1670년. 현종 11. 김경 제51대 통제사. 동재(東齋) 서재(西齋) 지음.

1681년. 숙종 7. 민섬 제60대 통제사. 충렬묘비(忠烈廟碑) 세움.

1695년. 숙종 21년. 최숙 제70대 통제사. 경충재(景忠齋) 지음. 김중기 제71대(?) 통제사. 숭무당(崇武堂) 지음.

1795년. 정조 19년. 충무공전서 발. 어제제문(御製祭文) 하사.

1840년. 헌종 6. 이충무공의 8대손 이승권 제172대 통제사. 강한루 영모문(江漢樓 永慕門 ) 세움.

1868년. 고종 5. 대원군이 전국에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에도 유일하게 본 충렬사 서원만은 보존.

1915년 무렵.  강한루 영모문. 바람에 쓰러짐.

1987년. 강한루 영모문 복원.

 

-통영 충렬사를 지은 순서를 보면, 정당<정침>을 가장 먼저 짓는 것은 당연한 일로써 그것이 아래의 집을 지을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지금의 자리가 그곳이었는지는 ?. 음으로 여섯 개의 문 가운데 지은 연대를 알 수 있는 것은 강한루 영모문과 홍살문인데,

홍살문은 위에서 보듯 1663년 현종이 다시 세우게 한 것으로 봐서 그 앞에서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문제는 이 홍살문이 지금과 같이 차가 다니는 길가였는지 아니면 더 멀리 그도 아니면 지금의 정문이 있는 곳이거나 더 안쪽에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정문은 더욱더 안쪽이었을 것이나 한편으론 정문이 반듯이 있어야만 하는가이다.

홍살문이 지금의 정문 자리이고 바로 그다음이 강한루 영모문이라 해도 어색하지는 않을 것 같다.  

아니면 강한루 영모문이 가장 늦은 1840년에 세워졌으므로 그 자리에 정문이 들어서고 홍살문이 지금의 정문자리라면.

정문을 처음부터 지금 자리에 짓기로 되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때문에 홍살문이 밖으로 쫓겨(?)나지는 않았는지.

지금 보아도 홍살문 위치가 어울리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충렬묘비의 자리도 그렇다.

지금은 외삼문 오른쪽 첫 번째에 모셔져 있으나 나중에 그리로 옮긴 것은 아닌지. 처음 지을 때부터 집과 문의 이름을 정해 놓았다면 모를 일이나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만약 정문이 없었다면 외삼문이 정문이 될 수도 있는 일.

충렬사 터는 낮은 산<언덕>으로 가장 먼저 정당을 짓고 내삼문을, 다시 언덕을 깎아내려 동재와 서재를 짓고 중문을,

이와 같은 식으로 내려오면서 경충재와 숭모당 그리고 외삼문.

그렇다고 보면 각 문이 만들어진 시기도 문안의 집들과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을 것 같다.

 

 

 

중문

 

외삼문과 내삼문의 사이에 있는 가운데 문으로 안으로 들어서면 동재와 서재가 있다.
입구<입구는 왜놈식 한자어. 들어가는 문> 양쪽에 있는 고목은 목련과의 태산목이다.

 

 

 

중문을 들어와서 본 모습. 동재와 서재가 있음.

 

 

동재(東齋)

 

 

 

 

향사를 앞두고 헌관(獻官 : 제관)과 집사(執事)들이 미리 여기에서 몸과 마음심을 깨끗이 하고 제복을 차려입는 곳으로

향사를 끝낸 뒤 여기에서 음복(飮福)을 한다. 

김 경 제51대통제사가 맞은 편의 서재와 동시(1670)에 건립하였다. 동·서재의 마당을 중정(中庭:가운데 뜰)이라 하는데

매년 4월 28일 탄신제 때에는 여기에서 승전무(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가 헌무(獻舞)된다.

 

☞ 주련
     盟山草木知 맹산초목지
    誓海漁龍動 서해어룡동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알고
     바다에 맹세하니 고기와 용이 감동한다.

 

 

 

서재(西齋)

 

 

향사에 쓰이는 제물을 장만하고 제기(祭器)와 제구(祭具)를 보관하는 곳으로, 

김 경 제51대 통제사가 맞은 편의 동재와 같은 해(1670)에 건립하였다. 

 

 

 

내삼문

 

 

정당의 출입문으로 삼 문 중 가장 안쪽의 문이다.

단아하면서도 정교한 건축양식으로 조선 중기 삼문조형(三門造形)의 정화(精華)이다.

솟을삼문으로 신문(神門)의 양쪽 초석을 해태로 조각하고 안팎에 활주(버팀 기둥) 8개로 지붕의 무게를 받혔는데

각 활주 아래의 석 자는 8각 돌기둥이다.


 통용문인 양쪽 협문(夾門)을 낮게 만든 것은 몸을 낮추고 삼가는 몸가짐으로 출입하기 위함이다.

 

익공식 맞배지붕에 겹처마이며 삼 문의 창방 위를 화반(花盤)으로 장식하였고

신문 양쪽의 봉황은 연화단청문양(蓮花丹靑紋樣:단청으로 그린 연꽃무늬)으로 조각하여 꾸몄다.

 

제례가 시작되기 앞서 헌관은 이 내삼문 단하(段下)에서 북향립(北向立:북쪽을 향하여 섬)하였다가

홀창(笏昌:제례의 순서 부름)에 따라 집사의 알림을 받아 계단을 오른다.

 

뜰에는 매년 공의 탄신제(4월 28일) 때 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인 승전무(勝戰舞)가 시연(施演)된다. <아래 정당과 내삼문에서>

 

 

 

삼 문의 창방 위를 화반(花盤)으로 장식. 신문 양쪽 해태 초석, 석 자 8각 돌기둥.

<충렬사를 화재로부터 예방하고 잡귀를 물리치도록 심방석에 해태를 새겼다.>

 

 

 

정당과 내삼문

 

 

안에서 본 내삼문

 

 

 

 

 

 

 

 

 

17시 20분. 내삼문을 크게 하여 보인 까닭은 바로 지붕 용마루에 있는 구멍 때문이다. 때는 이미 늦어 다른 사람들은 다 나가고 나도 정문을 막 나가려 하는데

거기 관계자 한 분이 오더니 충렬사에 대한 해설이라 할까 그러면서 가장 안쪽에 있는 이곳까지 다시 오게 되었다. 구멍에 관한 얘기도 있었다.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갔을 뿐 저렇게 구멍이 나 있는 줄은 몰랐다.

 

 

 

 

 

정 당(正堂)

 

 

 

정당은 민족의 수호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령에 제사를 올리고 공의 정신과 위훈을 만대(萬代)에 기리기 위하여

제7대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선조(宣祖: 제14대)의 명을 받아 세웠다.

이충무공 한 분의 위패를 모시고 역대 통제사가 약 300년간 제사를 받들어 온 가장 신성한 장소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맞배지붕으로 1606년에 창건하였는데 정당의 후원은 충절을 상징하는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기와지붕의 용마루에 새긴 주역(周易) 팔괘(八卦)는 음양의 조화(造化)와 만물이 화생(化生)하는 역(易)의 원리를 담고 있으며

제의(祭儀)는 정통 유교의 법식을 고수한다.

1895년 통제영이 폐영 되어 관급(官給)이 끊어지고, 경술국치(庚戌國恥:1910년 한일병탄)를 당하여 제사를 받드는 주체가 없어지자,

 이 곳 지방민들이 기미년 독립만세운동(1919)을 계기로 충렬사 영구 보존회(현 (재)통영 충렬사의 전신)를 결성하여

제향의 맥을 이어왔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왜경이 장군의 위패를 칼로 부수고, 삼문의 태극문양에 덧칠하여

일장기(日章旗)로 바꾸고 또 제사를 올리지 못하도록 정당에 못질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이승만 대통령,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선생을 필두로 송진우, 여운형, 신익희 등 많은 광복 지사들이 환국 참배하여 건국의 결의를 다진 유서 깊은 사당이며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선생이 국역 편찬한 '이충무공전서'의 산실이기도 하다.


정당을 향하여 중앙 좌측의 주련은 명나라 진린(陳璘:쳔린) 도독이 이충무공을 찬양한 어록의 한 구절인

「욕일보천지공(浴日補天之功: 해를 씻어 빛나게 하고 하늘의 구멍을 메운 큰 공)」이며,

우측은 이충무공께서 임전결의(臨戰缺意)하신「서해어룡동(誓海魚龍動) 맹산초목지(盟山草木知)」에서 따온 것으로

조선 고종조의 명신이자 예서체의 대가인 신관호(申觀浩) 제187대 통제사의 휘필이다. <위의 '정당' 글에서>

 

-사당 용마루에는 팔괘와 태양을 상징하는 둥근 혈()내삼문 용마루에는 달을 상징하는 반달형 혈을 조형하여 일() () , 밝을 명() 자를 표상하였다고 한다.

 

 

 

충무공 이순신 영정, 위패<나무 상자 안>

 

 

 

 

충무공 영정 왼쪽 오른쪽 모두에 팔사품으로 둘러쳐져 있어 보기에도 안 좋음.

박명록에 "신라 김유신 장군은 죽은 뒤 흥무대왕으로 추증되었으나 이순신 장군은 그러하지 못해 아쉽다."   

 

 

 

 

 

'경상남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통영 19-2 <아랫노대섬>  (0) 2019.01.01
통영 19-1 <아랫노대섬>  (0) 2018.12.29
통영 17 <비진도>  (0) 2018.12.12
통영 16-2 <연화섬>   (0) 2018.12.09
통영 16-1 <연화도>  (0) 2018.12.07